추가 테러 공포에 '가위눌린' 뉴욕
  • 뉴욕·정창래(자유기고가) ()
  • 승인 2001.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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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 환자들, 겁에 질려 응급실 찾아…
지하철 이용자도 평소 절반 수준
공포의 날 할로윈데이는 지났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9·11 테러 참사 직후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7주가 지난 현재 미국 국민은 여전히 테러와 공포에 인질로 잡혀 있다.


미국인의 심리 상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역시 뉴욕이다. 10월 30일, 맨해튼 북쪽 브롱크스 구에 위치한 뉴욕 양키스 야구팀 구장에서 부시 대통령의 시구를 시작으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 경기가 벌어졌다. 불과 하루 전에 연방 법무장관 애시크로프트가 미국에 대한 추가 테러 위협 정보를 입수했다며 10월11일에 이어 두 번째로 특급 경계령을 발표했는데도 부시가 경기를 참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세계에 방송되는 이 야구 축제를 통해 미국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날 경기에서 양키스는 이겼다. 예년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뉴욕의 축제 분위기는 다음날로 이어졌다.


할로윈데이 공립학교 출석률 62%




10월31일, 맨해튼 남부 그리니치빌리지에서는 제23회 할로윈데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20여만 인파가 '피닉스 부활'을 주제로 한 이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어이없게도 오사마 빈 라덴 가면을 쓴 사람이 많았다고 한 일간지는 보도했다. 두 행사가 경찰 병력 수천 명의 호위 속에 치러졌음은 물론이다.


11월1일, 목요일 뉴요커들은 이틀 간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아침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브롱크스 구에 거주하던 이비인후과 직원 케티 뉴엔(여·61)이 호흡기 탄저균 감염 판명 후 3일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9월11일 이후 각종 테러 경고에 무감각해진 뉴요커들을 일깨우려는 듯 연방 수사당국은 뉴엔의 죽음이 탄저균 테러가 일반 가정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경종을 울렸다. 10월4일부터 지금까지 발견된 탄저균 테러 17건 중 15건이, 또한 치명적일 수 있는 호흡기 탄저균 감염 7건 중 6건이 정부기관이나 언론기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연방 공무원 뉴엔이 병원에 입원한 후 계속 의식 불명 상태였기 때문에 수사관들이 그녀의 탄저균 감염 경로를 정확히 밝혀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잇단 테러 경계령과 탄저균 위협에 뉴요커들은 이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얀 가루만 보면 민감해진다. 탄저균의 백색 포자를 연상시킨다고 비행기 기내나 공공장소에서 커피용 분말 크림이 자취를 감추었다. 수상해 보이는 하얀 가루가 있다는 신고가 끊이지 않아 경찰차 사이렌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수사 당국은 시민들에게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수사 장소 주변의 출입을 통제해야 하니, 일상 업무나 생활에 방해를 받는다며 불평하지 못하는 것이 뉴요커들의 기본 소양이 되었다.


변덕을 부리는 기온도 이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데 한몫 하고 있다. 탄저병 초기 증세가 인플루엔자(유행성 독감) 증세와 비슷하다고 알려져 고열과 근육통을 앓는 시민 수만 명이 겁을 먹고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의사들도 이들의 증세가 탄저병으로 인한 것인지 감기인지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수 없는 처지이다. 시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되자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증세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맞는 것이 상책이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하지만 전염병 전문가들은 독감 백신을 아껴야 한다고 경고했다. 독감 증세가 있다고 다 독감에 걸리는 것이 아니며, 뉴요커 수백만 명에게 주사를 놓기에는 백신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독감 백신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백신이 공급되지 않을 경우, 오히려 독감으로 사망하는 숫자가 더 많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진퇴양난인 셈이다.




행인이나 지하철 이용자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뉴욕 지하철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마이클 산체즈(남·34)는 지하철 이용자 숫자가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브롱크스 구에 산다는 그는 자신도 퇴근 후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에서 나오기를 꺼린다고 했다.


탄저균 테러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연방 우체국 직원들은 한 술 더 뜬다. 10월30일의 기자회견에서 줄리아니 시장은 뉴욕 시내 우체국 직원들의 30%가 병가 신청을 하는 바람에 우편 배달에 지장이 있다고 밝혔다. 연방 우체국은 이 때문에 임시 직원들을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뉴욕 시 공립 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시 교육청에 따르면 공립 학교 학생 1백10만 명 중 10월31일 출석률이 겨우 62%였다고 밝혔다. 전통적으로 할로윈데이에는 출석률이 떨어지지만, 지난해 78.6%에 비해 더 떨어진 것은 추가 테러 경계령, 생물 화학 테러에 대한 두려움, 첫 탄저균 감염자 발생 등에 기인한 것 같다고 했다. 출석률이 떨어진다고 임시 학생들을 모집할 수 없다는 것이 우체국과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허드슨 강 건너편 뉴저지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다.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버건 카운티에서는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에 흰 가루가 묻어 있다며 신문 구독을 취소하려는 사례도 있었다. 10월 중순 대형 할인점 두 곳에서 아랍계로 보이는 남자들이 초콜릿 캔디를 한꺼번에 수만 달러어치 사갔다고 직원들이 지역 언론사와 수사당국에 신고했었다. 연방수사국(FBI)이 수사한 결과 그 남자들은 순전히 소매 영업을 위해 초콜릿 캔디를 구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2주일 후, 할로윈데이 저녁에 과자를 얻으려고 이웃집들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뉴요커들은 너무 지쳐 있다"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이제 뉴욕에서는 어둠이 1시간 더 일찍 찾아온다. 미국의 경기는 이미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추가 테러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은 점점 고조되고,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거나 사살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믿는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필자가 11월1일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현재의 탄저균 테러를 내부에서 미국인이 저지르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아 달라는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의 주문을 받아들이기에는 뉴요커들이 너무 지쳐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뿐'이라고 역설하는 지도자들을 따르기에는 뉴요커들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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