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전쟁은 에너지 전쟁인가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rena@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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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파이프라인 협상 결렬 땐 공격” 협박설…탈레반, 아르헨티나 기업 선택해 파국?

탈레반, 가스 파이프라인 협상을 위해 텍사스에 도착.’ 1997년 12월4일,
영국 BBC 뉴스는 이런 제목을 붙인 기사에서 아프가니스탄에 파이프라인을
부설하는 협상이 미국 에너지 기업 유노칼과 탈레반 사이에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1996년 9월 카불을 점령해 세상을 놀라게 한
탈레반이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기사는 탈레반의 미국 도착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했다. ‘유노칼은 파이프라인 사업을 둘러싸고 그동안 아르헨티나
기업 브리다스와 경쟁해 왔다. 브리다스는 지난 달 20억 달러를 투자하는
파이프라인 협정을 곧 맺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이 통제하는
카불 라디오는 지난 5월 브리다스가 파이프라인 공사를 곧 시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카불 라디오는 브리다스와 유노칼 대표단이
몇 차례나 카불을 방문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이 사실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이 미국 기업의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아르헨티나
기업과도 협상을 벌였다는 점이다. 브리다스가 탈레반과 곧 조약을 맺을
것처럼 말했으니 유노칼로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출간된 책 <빈 라덴, 금지된 진실>에 따르면,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 벌어진 파이프라인 협상은 뉴욕 테러가 일어나기 몇 주
전에 결렬되었다. 부시 정부는 이 협상에서 탈레반이 미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면 ‘금 카펫’을, 거부하면 ‘폭탄 카펫’을 선물로 주겠다고
말했으며, 그 후 서방 외교관들에게는 10월 중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탈레반은 미국의 조건을 거부한
후에 브리다스와 계속 접촉했다고 하니 탈레반과 브리다스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브리다스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 첫 세대가 세운 기업이며, 현재 남미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가스 기업이다, 가업을 물려받은 현 대표
카를로스는 1978년 회사를 다국적 기업으로 확대했고, 옛 소련이 무너진
뒤에는 서방의 어느 업체보다 앞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에 눈을
돌렸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니야조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나라에
카를로스가 찾아 오자 감격해 그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그 결과 브리다스는
1992년과 1993년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의 가스와 카스피 해 쪽 석유
자원 개발권을 얻었다. 브리다스는 1994년부터 석유를 수출했으며, 가스
매장 지역도 새로 찾아냈다. 확인된 가스는 무려 7백60억㎥, 파키스탄이
갖고 있는 전체 가스의 두 배를 넘었다.



유노칼과 밀착한 니야조프, 브리다스 배신해


그러나 문제는 수송로. 가스는 석유처럼 오랫동안 보관하기가 어려워
시장에 즉시 수송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급해진 것이다. 카를로스는 가스 수출 사업을 벌이자고 니야조프를
설득했다. 그 결과 이듬해 3월,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 정부는 파이프라인
부설에 필요한 기초 조사 작업을 브리다스에게 맡긴다고 합의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자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자국을 중앙아시아의 물류 통로로
만드는 파이프라인 사업에 적극 나섰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카불
장악을 준비하고 있던 탈레반도 브리다스에게 호의를 보였다. 브리다스는
도스툼·마수드 등 탈레반의 공세에 몰려 있는 북부 군벌들과도
접촉했다. 그 결과 1996년 2월 카불 정부와 파이프라인 부설 공사 후
30년 동안 운영권을 보장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브리다스는 이렇게 사업의
기초를 꾸리고 나서 다른 업체와 합작 벤처를 추진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아시아 곳곳에 투자하고 있던 유노칼은 이때 협력 업체로 꼽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브리다스에 먹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니야조프가
변심한 것이다. 그는 1994년 9월 조약 개정을 요구하며 브리다스의 석유
수출을 가로막았다. 브리다스는 이 요구에 응해 자신의 이윤율을 10%
낮추었다. 하지만 니야조프는 가스 관련 조약도 바꾸자고 요구했다.
브리다스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니야조프가 브리다스에게 콧대를 세우게 된 배경에는 유노칼이 있다.
유노칼은 투르크메니스탄에 독자적인 파이프라인을 설립하는 구상을
제안하면서 브리다스에 비해 더 큰 이윤을 보장했던 것이다. 니야조프는
유노칼 편에 서야 미국 돈을 끌어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급기야
1995년 10월 뉴욕에서 유노칼과 파이프라인 조약을 맺었다고 발표해
브리다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유노칼은 사우디아라비아(델타 오일)·러시아(가즈프롬)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석유 수송 파이프라인 부설 조약도 맺어 브리다스의
기를 꺾었다. 유노칼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은 카자흐스탄에서 같은
미국 기업인 셰브론이 실패한 경험을 거울 삼았기 때문이다. 셰브론은
이곳의 석유를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하는 조약을
맺었지만 러시아의 반대를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이 무렵 미국의 석유 업체들은 중앙아시아 자원 확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1995년 초 연합체를 결성하고
미국 정부에 대외 정책에 관한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국가안보위원회(NSC)가
이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고 정부 각 부처 대표와 중앙정보국이 참여하는
‘카스피 해 담당 위원회’가 구성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브리다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브리다스는 유노칼에 손해
배상액 1백50억 달러를 요구하는 소송을 텍사스 법원에 냈다. 합작 벤처를
목적으로 공개한 기업 정보를 유노칼이 훔쳤으니 미래의 수익까지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리다스는 니야조프 정부도 자원 개발 조약을 위반한
혐의로 국제 기구에 고발했다.


하지만 텍사스 법원은 브리다스가 건 소송은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재판소가 맡아야 한다고 판결해 유노칼의 손을 들어 주었다.
클린턴 정부는 유노칼을 공개 지원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는 부토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브리다스 지원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부토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요구를
부당한 압력이라고 느꼈다. 그 후 파키스탄에 들어선 정권에서는 총리와
자원장관, 정보부장이 모두 유노칼을 지지했다. 이때만 해도 유노칼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노칼과 브리다스의 싸움은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후 역전했다.
브리다스는 한 사우디아라비아 기업과 50 대 50 합작 회사를 세웠다.
사우디아라비아 비밀 정보부장과 끈이 닿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회사는
아프가니스탄을 지나는 파이프라인 공사에 투자했다. 브리다스나 국제
컨소시엄은 파이프라인 공사를 서둘러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초반에 카불 정권을 지지했던 유노칼은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정권이 국제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투자를 미루었다.
그 사이 카불에 기술 학교를 세워 현지 인력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투자
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노칼은 1996년 11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을 접했다.
브리다스가 탈레반은 물론 여타 군벌과 파이프라인 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파키스탄 외무장관은 급거 오마르를 찾아가 유노칼과
손잡으라고 설득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브리다스는 이듬해 3월
카불에 사무소를 열고 탈레반과 함께 1백50쪽에 이르는 문서에 서명했다.
유노칼은 파이프 공사를 재촉하는 파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의
요구에 밀려 1997년 5월 3자 조약을 맺었다. 투자 계획을 밝히고 1998년
초에 공사를 시작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유노칼로부터 공사 시작 시점을
확인받은 두 나라 정부는 1997년 10월 파이프라인 통과료 15%를 탈레반에
떼어주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자기들이 빠진 채
이루어진 합의에 불만을 터뜨리고 통과료 비율을 더 높이라고 요구했다.


미국 여성단체들 “유노칼은 범죄 기업”


탈레반은 카불을 장악한 때부터 브리다스와 유노칼이라는 두 가지
카드를 저울질했던 것이 분명하다. 탈레반은 파이프라인 부설 공사에
덧붙여 도로·수도·전화·전선 같은 종합적인 하부
기반까지 원했는데, 브리다스가 이에 응하자 유노칼을 차버린 것이다.
유노칼은 중앙아시아 전략에서 반 러시아 노선을 드러내 기존 러시아
기업은 배제하고 일본·한국·파키스탄 기업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확대했다. 그러나 미국 여성단체들은 유노칼을 탈레반과
협상하는 범죄 기업이라고 거세게 비난했다. 여성 유권자를 무시하지
못하는 클린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 공격을 하기에 이르자
유노칼은 마침내 파이프라인 사업에서 손을 들었다.


부시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브리다스와 협상을 지속한 탈레반은 ‘폭탄
카펫’을 선물로 받고 사라졌고, 미국의 어느 기업보다 한 발짝 앞서
중앙앙시아 자원 개발에 나섰던 브리다스는 아르헨티나에 엄습한 국가
부도 사태에 휩쓸렸다. 아프가니스탄에 임시정부 수반으로 등장한 카르자이는
유노칼이 파이프라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 자문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적수가 사라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앞으로 유노칼은 독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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