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창살 뜯어 삼켜 자살을 기도하고…
  • 특별취재팀 ()
  • 승인 2002.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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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직전의 탈북자들 30시간 면담록’ 독점 공개
<시사저널〉은 지난 3월14일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의 탈북 동기, 북한에서의 참상, 거사 직전까지의 행적이 담긴 인터뷰 자료를 독점 입수했다. 테이프 10여 개에 모두 30시간 분량의 증언이 담긴 이 자료에는, 이 성씨 부부·김 향양(이하 모두 가명) 등 이번 사건에 참가한 탈북자 대부분의 생생한 육성 증언이 담겨 있다. 인터뷰는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하기 직전, 탈북자들이 각자의 은신처에서 저마다 죽기를 각오하며 거사를 준비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탈북자들의 안전과 취재원 보호를 위해 정확한 인터뷰 시점과 장소, 그리고 자료 제공자의 신원은 일절 표기하지 않았다.






이 성·김용희 부부


북한을 세 번째 탈출한 이씨는 북한군 장교 출신으로 삼팔선 근처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군 제대 후 북한 혁명유적지에서 사진사로 일하기도 했다. 부인 김씨는 북한에서 혁명유적지 안내·해설원으로도 근무했다.



왜 세 번씩이나 북한을 탈출했나?


처음에는 중국 와서 방조(도움)받자고, 돈 벌자고 생각했다. 제일 처음에는 라디오를 들었다. KBS가 북한 로동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동료가 술 먹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라디오 들은 사실이) 유포됐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르게 말했다(밀고를 하면서 이야기를 부풀렸다는 뜻).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한 것으로 들었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변방(맨 처음 탈북 때 잡혔던 곳)에 있을 때 쇠창살을 뜯어 삼키기도 했다. 참대나무 젓가락 한 벌과 놋 젓가락 한 벌, 그리고 숟가락을 삼키기도 했다. 도문 감옥에서 안도 변방으로 호송될 때의 일이다. 참대나무 젓가락은 길이가 25cm였는데, 종이에 감아서 넘겼다. 숟가락도 삼켰는데, 처음에는 대가리를 먹었다. 쇳대를 삼킨 뒤 한 시간 만에 진통이 와서 소리를 질렀다. 쇳대가 위에 박힌 것 같았다. 간수가 와서 끌어내갔다. 병원에 가니까 십이지장에 (쇳대가) 박혔는데,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해 주겠다고 해서 사회 병원(민간 병원을 말함)에 가서 수술했다. 중국 의사들이 수술했다.


수술한 상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재발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배꼽에서 명치 끝까지 13cm 정도 수술 자국이 있다.


세 번째 탈출 경위는?


조선에 가니까, 피를 많이 흘렸고 바싹 말라 있으니까 완치되어야만 감옥에 보낸다고 돌려 보냈다. (그런데 몸조리를 하고 있을 무렵) 우리 처에게 6년 행시(징역)가 떨어져 다시 (탈출을) 결심했다.


(부인 김씨를 향해) 부인도 감옥에 간 경험이 있으실 텐데….


감옥에 가면 우선 첫째로 여자 교환수들을 시켜서 옷을 다 벗긴다. 현수(앉았다 일어났다)를 백번 시킨다. 몸 구석구석(항문이나 음부를 뜻함)에 돈을 넣었을 경우 사람이 운동하다 보면 그런 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옥 생활을 좀더 소상히 말해 달라.


검사를 마친 다음에는 담당 지도원이 심문한다. 이 사람들이 돈이 있을 것 같다 할 때에는 말이라도 곱게 해주려고 한다. 돈이 많으면 자기 상급 과장과 같이 상의해서 빼내줄 수도 있다. 내가 온성 사람인데, 회령 보위부에서 붙잡히면 뺄 수 있다.

그러나 온성 보위부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사는 곳으로 간다. (거주지로 가서는) 일단 들어가면 다 뺏는다. 휴지까지도. 생리라도 할 때는 제 속옷을 뜯어서 해야 한다. 용변 보려고 할 때에도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인데, 변소 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봐야 한다.

왜인가. 붙잡히는 경우에 돈을 비닐 종이 같은 데 말아서 먹을 수도 있다. 그게 대변으로 나올 수 있다. 변소에다 보면 그 돈을 못 찾는다. 그래서 밖에다 변을 보게 하고, 변을 본 다음에는 나뭇가지 하나씩 들려주고 헤치라 한다. 헤쳐서 없으면 괜찮고, 있으면 자기 손으로 뽑아서 바쳐야 한다.


감옥에서 여자로서, 또 인간으로서 수치스럽고 괴로운 일은 없었나?


도문 감옥에서 탈출하려는데 스물여섯 살짜리 처녀애가 밀고했다. 어린 마음에, 고발하면 자기를 빼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림 없는 일이다. 나가 보니까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우리가) 도망치려 한 것을, 제가 고발했다고 말은 못하니까 (우리는) ‘얘가 중국 감옥에 있을 때 중국 간수들하고 좋아하고 감옥 안의 소장하고도 좋아하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지냈다’고 말했다(분풀이로 고자질했다는 뜻).

그러니까 (그 여자 애가) 맞기 시작하는데, 감옥 안의 살창에 머리털을 감아놓고 회초리 같은 것이 있는데, 고압 수지 같은 것으로 때렸다. ‘이 개 간나야, 중국 가서 중국 불알을 몇 개나 맛보았는가’ 하면서, 처참하게 때렸다.


지금 아이도 나와 있는데….


데려온 지 며칠 되지 않는다. 1주일 정도 되는 것 같다.


(다시 남편을 향해) 지금 또 잡히면 세 번째가 될텐데…. 현재 어떤 각<오인가?


일단 잡히면 자결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1년이고 2년이고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죽게 될 텐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약도 갖고 있다.


갖고 있다는 약이 무엇인가?


싸이나이다.


싸이나가 뭔가?


독약(청산가리)이다.




주 하(20대 중반)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이다. 북한 외교관 양성 기관인 평양외대 학원반에서 6년 동안 전문 교육을 받은 뒤,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해 영어를 전공했다. 원래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는데, 199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를 보면서 북조선 사회주의가 희망이 없음을 느꼈고 탈출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교원 생활을 하며 탈북할 기회를 엿보다가, 2년 전 여름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시안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강제 송환된 바 있다. 북한 감옥에서 5개월 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병 보석으로 풀려나 집에서 휴양하다가 지난 1월 북한을 또다시 탈출했다. 어머니와 대학생인 누이동생이 아직도 북한에 있다며 인터뷰를 완강히 거부하기도 했던 그는,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처와 한국 정부의 북한 지원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국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대한 의견은?


한국 정부가 북조선에 대해서 탈북자들의 운명을 보살펴 준다든지 그런 것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중국 정부가 승인할 수 없고, 한국이 다 들고일어나도 매우 바쁠 것(즉 어렵다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일에 큰 관심 없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햇볕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한 6년 동안에 준 것이 한 6억 달러 넘어간다. 그런데 한국에서 1년 동안 썩어져가는 음식 찌꺼기가 10조원어치이다. 내 타산으로는 77억 달러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북조선에는 1년에 얼마나 주는가 하면, 고작 1억 달러 정도다. 이거 주면서 국제적으로 도와줄 곳이 한국밖에 없다 하니까 바라지 않는다. 1인당 국민 총생산액에서, 이것도 계산해 보니까 몇천 분의 1이다.

그걸 주면서 지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햇볕 정책이다 해서 무조건 다 좋아하는 것 아니다. 얼굴(얼릴) 때는 얼구고(얼리고) 녹일 때는 녹여야 한다. 지금 겨울이 돼서 길이 얼궜는데 녹이면 감탕(진창)이 되어버린다. 얼구는 것보다 못하다. 지금 방식으로 지원해 준다면 계속 정권을 지탱시켜 줄 뿐이다. 내 생각으로는 나무 뿌리 같은 것은 빨리 녹이면 녹일수록 좋다. 교육 같은 데 투자해야 한다. 이건 한국을 위해 투자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이제 통일된다 하면, 이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데 이는(즉, 격차를 메우는 것) 한국 몫이다. 20년 후에 조선을 메고 나갈 사람이 다 학생들이다. 이들이 훗날에 조선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한국에서 준 학습장을 쓰고 컴퓨터를 쓰고 이러면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고, 그리고 한 20년 후에라도, 통일된 후에라도 조선에서 이렇게 자기를 키워준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와 학생 들 사이에서 정부를 비꼬는 예를 들면 몇 가지나 있나?


갑자기 생각나지는 않는데, 하루 동안 생각하면 100개도 생각날 것이다(웃음). 식량을 얻어타 가면서 ‘나라에서 쌀을 주어서’ 한다든지, 이상하게 부르는 노래, 비꼬는 노래가 많다(즉 배급받는 식량이 외부 원조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노래로는 ‘나라에서 쌀을 주어서…’라고 비꼰다는 뜻). 선전하고 현 상태하고 완전히 달라 풍자할 소재는 많다. 여론이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주 하씨는 앞으로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반도 통일 후 남북한이 모두 필요로 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 외교관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주씨는 스페인대사관 진입에 참가하지 않았다.





김 향(18세)


함경남도 단천 태생. 부모가 굶어 죽은 후 큰어머니집에 얹혀 살다가 식량이 부족하자 무작정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이곳저곳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고 다녔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교회 관계자의 보호를 받아온 김양은, 배가 고파 우연히 국경을 넘었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처음 탈출할 때 혼자 나왔나?


동생하고 같이 왔다. 부모는 다 돌아가시고 우리끼리만 남았으니까, 우리도 살길 찾아서 떠났다. 돌아다니다가 중국에 온 것이다.


어떻게 중국에 왔나? 지금 나이는?


1985년도생이다. 그때 부모님 돌아가시고…그 다음…(녹음 상태 불량)…큰어머니 집에서 나왔다. 우리가 중국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들 집 나갈 때, 조금 있다가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갈 때 기차 타고서 회천 쪽으로 가다가 회천 가기 전에 그 근처에 내렸다. 거기서(그곳에서) 밀하고 감자가 많이 난다.

그래서 겨울이라도 언 감자가 있으니까 겨울 나도 되겠다 싶어 거기서 내렸다. 마을에 들어가서…(녹음 상태 불량)…집집마다 들어가서 하룻밤씩 자면서…거기서 며칠 동안…(녹음 상태 불량). 다른 집에 들어 밥을 빌어 먹고 그러면서…작은 촌이 있어…그 촌에서 며칠 있다가 강을 건넜다. 큰 강이 있었다. 그 강이 두만강인지 몰랐다. 그 큰 강 보고 나와서 동생을 보며 ‘우리 큰 강 건넌다’라고 말했다. ‘우리 큰 강 건너가서, 마을에 어디 가서 지내자.’ 동생하고 같이 계획하고서 겨울에 건너가서 보니 한족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은 그거 보고 깜짝 놀랐다. 한족 사람들이 중국말로 얘기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조선말을 배웠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얼굴 탁 보고서, 조선 애들이라는 것을 탁 안 것 같았다. 우리들에게 ‘밥 먹었느냐’라고 물었다. 못 먹었다고 하니 밥 주고, 우리는 거기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바로 나왔지만, 먹을 것 주고 십자가를 손바닥에 그으며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다.


동생은 몇 살인가?


지금은 만으로 열네 살. 남동생이다.


왜 북한을 떠나고 싶었나? 거기서 먹을 것은 잘 먹었나?


집에서는 주로 죽을 먹었다. 풀을 뜯어다가 냄비에 넣고, 거기다가 한번 데쳐 가지고 며칠씩 우려서 생독을 뺀 다음에 밀가루를 조금씩 넣어가지고서 죽을 해 먹는다.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신형용(36세)


함북 청진 출신으로 아버지는 설계 기사. 인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3년 군에 입대해 특수 부대에서 근무했다. 6개월 동안 남한 군복을 입고 근무하기도 했다. 제대 후 음덕군 요봉 탄광에서 1998년 1월 탈북할 때까지 일했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부인과 함께 탈북했는데, 아이 둘은 영양 실조로 겨우 돌을 넘기고 죽었다. 아버지는 1987년에 병사했고 어머니는 북한에 생존해 있다. 그는 탈북했다가 붙잡힌 뒤 북한 감옥에서 짐승 취급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탈북 과정을 말해 달라.


지난해 4월에 붙잡혀 북에 끌려갔다. 중국인에게 잡혔을 때, 몸 수색을 당했고 돈과 귀고리·목걸이까지 빼앗겼다. 북한 구류소에서 밤에 50여 명과 같이 잤다. 남녀가 반반쯤 잤다. 남녀의 항문까지 열어서 조사했다. 폴리에틸렌 비닐 파이프로 때렸다.

그 전에는 각목으로 때리다가 요즘은 상처 나지 않게 폴리에틸렌으로 때린다. 여기서 다시 온성 단련대로 끌려가서 10여 일간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다. 벽돌 공장의 담을 쌓기 위해 강에 나가서 돌 나르는 작업을 했다. 넷이 한 조가 되어 돌을 싣고 달려야 하는데, 처지면 저녁에 바람벽에 머리를 박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기서 임신 6개월 된 여자가 뇌출혈로 유산하는 것도 봤고, 20세 중반 가량 되는 여자를 강제 유산시키기도 했다. 식수는 양철통의 녹슨 물을 그대로 썼다. 가장 처참한 곳은 도 집결소였다.

여기서 녹슨 물을 마시고 남자 두 명이 죽었다. 봄 배추 이파리 나는 것을 흙과 함께 뽑아서 먹어야 하고, (간수들이) 소똥에 박힌 낟알을 파먹게 했다. 간수들이 죄수들을 때릴 때 자기 손이 아프니까 다른 죄수로 하여금 때리게 했다.








최병섭(52세)


함북 온성 출신으로 공장 근로자로 일하다가 국경을 넘었다. 그의 증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최근 탈북자들이 몽골과 동남아 쪽으로도 상당수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생활에 대한 소감은?


북한에 비하면 중국은 천국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하루 자는 게 지옥이다. 가족들이 어느 선교사 집에 있는데, 경비 서고 안에서 자물쇠로 잠가 놓고 잔다. 약 3만에서 10만 위안을 주면 동남아로 입국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몽골로 가는 길은 값은 싼데 더 위험하다.





이성리(26세)


목축업자. 형님이 현재 북한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어 인터뷰를 꺼렸다. 그는 북한 사회의 강압적 분위기, 식량 확보를 둘러싸고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정과 부조리에 대해 말했다.



북한을 탈출한 이유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먹는 것도 충분치 않았다. 배급은 혹시 한두 킬로씩 세대 당 줄 때 있다. 그 때는 배급소에 아는 사람이 있거나, 직업이 높은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뒷문으로 타내 간다. 그리고 또 빨리 가지 못해 떨어지면 타지 못하고, 힘이 있어야 배급을 뒤에서 타기도 하고 직업이 있어야 뒤에서 타기도 하고. 서로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즉 힘을 써주면) 한두 킬로 오가며 탈 수 있다.


‘한두 킬로’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1주일을 말하는 것인가, 한 달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달 될지, 두 달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자유도 없어서 넘어왔다고 했는데, 무슨 자유가 없다는 말인가?


모든 자유가 다 없다. 한마디로 예를 들면 내가 머리를 기르고 싶어도 마음대로 기르지 못한단 말이다.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었는데,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느꼈나?
조선에 온 중국 사람들이 차츰 지나고 나니까 자기네 속심(속내)의 말을 얘기하더라. 우리 중국에서는 보고 싶은 것도 보고, 돈만 있으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있다. 정말 조선 사람들 불쌍하다고. 처음에는 도시 무슨 소린가 의문을 가졌다. 차츰 생각하고, 차츰 있어 보니까 정말 조선 사람들이 ‘산 등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북한에서 가장 싫었던 것은?


매주마다 생활 총화해야 한다. 한 주일간 생활에서 잘못한 점을 매 주일마다 총화를 짓는다. 단체 별로, 작업반 별로, 사로청 별로, 농근맹 별로, 당원 별로 몽땅 다 총화해야 한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그날은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하고 반성해야 한다.

매주마다 무슨 잘못한 일이 많아서 반성해야 하는가. 그것이 정말 싫었고, 그 다음으로 학습을 또 매주 한다. 그리고 한 주일에 회의도 몇 번씩 되니까.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한 주일에 몇 번 씩 회의하느니보다는 하나라도 일해서 하나라도 벌어서 먹고 살겠다, 이런 생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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