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어쩌다 이 지경 됐나”
  • 광주·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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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방선거 민심 르포/후보 교체 물의·금품수수설 겹쳐 ‘반 민주당’ 여론 확산
"선배님, 창피해 죽겠습니다. 어쩌다 광주가 이 지경이 됐습니까.” “광주가 부패의 거리, 사기꾼들이 판치는 거리가 되어부렀네.” 최근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 결정을 둘러싼 ‘코미디 같은 일’을 전해 들은 한 시민운동가와 재야 원로가 한숨을 쉬며 나누었다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를 비롯한 광주 지역 지구당위원장 6명이 모조리 금품 수수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검찰 조사를 받을 처지가 되었다(42쪽 상자 기사 참조). 민주당이 급속히 몰락하면서 호남 지역 지방 선거는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약진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44쪽 딸린 기사 참조).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 결정 과정은 3류 소설을 방불케 할 구태의 전형이었다. 후보자 등록일을 하루 앞두고 당 공천 후보가 전격 교체되었다. 민주당은 후보자 입후보 등록일인 지난 5월28일 이정일 후보 공천을 철회하고, 3선 경력인 박광태 의원(59)을 광주시장 후보로 공천했다. 5월29일에는 광주시지부장을 맡고 있는 정동채 의원(광주 서구 지구당위원장)이 시장 후보 경선 잡음의 책임을 지고 시지부장 직을 사퇴했다.


민주당이 후보를 교체하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경선을 무시하고 지역구 의원들이 모여 자신들 마음대로 후보를 결정했다는 비판이 무성했다. 광주 북구 문흥동의 한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들고 있던 한 50대 버스 운전기사는 “민주당, 이번에 박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개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5·28 담합, 구태 정치 진수 보였다”


‘광주·전남 시민단체 연대회의’(연대회의, 상임 공동대표 정찬용·최태옥)는 시민들의 이런 정서를 반영해 5월29일 박광태 후보가 ‘부적격 인물’이라며 거부 입장을 공식 표명했다. 연대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선정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구당위원장들이 시민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네가 해라. 아니면 내가 한다’는 식의 거래를 해 박의원을 시장 후보로 결정했다”라고 비난했다.


박광태 후보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한 시민단체 간부는 “박광태 후보는 3홍 게이트를 거치며 ‘비리 온상’으로 낙인이 찍힌 ‘동교동 인물’이다. 광주 시민의 성숙한 정치 의식을 보여준 3·16 정치 혁명의 ‘노풍’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구태 의연한 정치인이다”라고 공격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시내 다방에 나갔더니 이번 시장 후보 번복 파동은 세계 정치사에 유례 없는 연구 대상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라고 고소해 했다.


민주당 광주시장 경선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지난 4월18일, 지역구 국회의원 6명은 강력한 경선 후보인 고재유 현 광주시장의 대항마로 최인기 전 행자부장관을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최씨는 열흘 만에 돌연 경선 불참을 선언했다. ‘국회의원 누군가가 최씨에게 상처를 주려고 장난을 쳤다’ ‘(의원들이) 돈을 요구해 포기했다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경선에 나섰던 이승채씨(변호사)도 이정일씨(56·전 광주서구청장) 지지 의사를 밝히고 사퇴했다. 이에 힘입어 5월4일 열린 경선에서는 이정일 후보가 고재유 후보를 누르고 신승했다.


고재유 후보측은 그러나 ‘정동채 시지부장이 부정 경선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경선 불복’을 선언하고 정동채 시지부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정일 후보측이 사퇴한 이승채씨 운동원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 조 아무개씨(48) 등 2명이 구속되었다. 이정일 후보 부인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승채씨가 사퇴하기 전에 이정일 후보 쪽으로부터 정무부시장 자리를 약속받았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광주 지역 의원 6명은 후보 교체를 검토했다. 그러나 시민 경선을 거친 후보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정동채 시지부장이 반대하자 5월21일 이정일 후보 교체 불가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했다. “이정일 후보측으로부터 5천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줬다”라는 김태홍 의원의 5월24일 술자리 폭로 발언이 일파만파를 몰고왔다. 결국 ‘돈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한 민주당은 5월28일 밤 당을 구원할 대타로 박광태 의원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광주 시내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는 그날 밤 국회의원들의 ‘야합’ 스토리는 이렇다. 정동채 지부장을 제외하고 광주지역 의원 5명이 긴급히 모임을 가졌다.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이미 광주시지부에 후보 교체를 위임한 상태였다.


곳곳에서 부정 경선 시비로 ‘몸살’


몇몇 의원들이 초선이지만 행정 경험이 있는 ㄱ의원을 시장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는 웬일인지 완곡히 사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초선인 ㄱ의원이 자기가 시장 후보로 나서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그러나 의원 4명이 극구 반대했다. 후보자 교체 파동의 결정적 빌미를 만든 당사자라는 이유였다. 남은 의원들이 다시 머리를 싸매고 숙의했다.


결국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3선 경력을 내세운 박광태 의원을 추대하기로 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안다는 한 지역 인사는 “이정일 후보와 고재유 후보도 박광태 의원이 후보로 나서는 데 동의했다. 이들을 위한 ‘당근’이 마련되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정일 후보에 이어 경선 차점자였던 고재유 전 시장의 경우 한때 박광태 의원의 지역구였던 ‘북 갑 공천’ 내락 소문이 무성했다.그러나 현행 선거법상 ‘자치단체장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경우 60∼180일 전에 사퇴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자격 미달인 것으로 드러나 ‘(박광태 의원에게) 속았다’며 뒤늦게 땅을 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광주 지역 의원들의 ‘5·28 담합’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밀실 야합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박광태 후보는 역대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 가운데 가장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박광태 의원의 한 보좌관은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텃밭에서 저지른 구태 정치는 이뿐만이 아니다. 광주 북구청·동구청·서구청이 모두 부정 경선 시비로 몸살을 앓았다. ‘구청장 후보 가운데 아무개씨가 수억원을 주고 후보 자리를 샀다더라’ ‘민주당도 막판인데 돈 받지 않은 의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더라’는 소문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광주 서구청장 경선에서는 더욱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부구청장 출신인 김종식 후보가 당선되었다가 중앙당의 여성 우대 방침에 따라 물러나고 '경선 3위'인 안성례 후보가 공천을 거머쥐었는데, 나중에 다시 김종식 후보가 공천을 받았고 안성례 후보가 이에 반발해 탈당했다.




“노풍이여 불지 마라” 시민단체 규탄대회


광주만 파란을 겪은 것은 아니다. 지난 5월15일 민주당 박주선 의원이 참석한 전남 화순의 한 저녁 모임에서는 폭력 사건이 발생해 임호경 민주당 화순군수 후보가 공천이 취소되고 폭력 혐의로 기소되었다. 폭탄주에 취한 군수 후보에게 폭행당해 전치 4주 진단을 받은 현직 경찰서장은 직위 해제되었고, 참석자들은 망신살이 뻗쳤다.


이날 모임에는 특히 박태영 민주당 전남도지사 후보가 한때 동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구설에 올랐다. 민주당 사람들의 ‘3류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이 일선 군 지역에까지 팽배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시민단체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 규탄대회를 열었다. 광주·전남 86개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은 지난 5월23일과 27일 ‘부패정치인 양산 민주당 규탄과 시·도민 주권회복 선언대회’를 열고 ‘민주당 심판’과 ‘부패 반대’를 공개 선언했다.
호남 민심이 요동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민주당은 현재 부산에서 전력을 쏟고 있는 노무현 대선 후보를 광주시장·전남도지사 선거에 한두 차례 불러들여 지원 유세 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광주가 살려면 이번 지방 선거에서 노풍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 3월16일 노풍을 만들어낸 광주에서 이번에는 역으로 6월13일 노풍 반대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이후의 광주는 노무현을 선택했지만 민주당은 그 기대를 저버렸다. 20년을 지지한 집권당에 배신당한 뒤 정신적 공황을 맞고 있는 광주의 6·13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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