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을 보면 한국 축구가 보인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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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신화’의 주역 박지성의 성장 과정에는 ‘히딩크 축구’의 압축 파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의 박지성이 포르투갈을 기절시켰다.’ 미국 AP통신은 6월15일 한국-포르투갈의 경기 결과를 이렇게 타전했다. 그 경기에서 스물한 살 박지성은 세계 변방의 한국 축구를 세계의 중심으로 몰고 갔다.


골을 넣은 박지성은 팔을 벌려 비행하듯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며 히딩크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포옹에는 자신을 키워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 장면은 폴란드전 선취골을 넣은 황선홍이 연출한 장면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황선홍은 선수들을 뿌리치고 히딩크 감독 앞에까지 달려갔으나 포옹은 박항서 코치와 했다.





아버지 실수 덕에 축구와 인연



이에 대해 대표팀을 밀착 취재해온 한 축구 전문 기자는 “황선홍은 히딩크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히딩크와 보이지 않는 틈이 있다. 하지만 박지성·설기현·송종국·이천수는 히딩크가 키워낸 자식들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박지성을 비롯해 송종국·김남일·설기현 등이 히딩크의 조련으로 세계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또 이들 사이는 단순한 선수와 감독 이상의 존경과 믿음으로 단단히 엮여 있다. 그래서 이 선수들, 특히 박지성의 성장을 보면 히딩크 이후 한국 축구가 성장할 모습도 함께 보인다.



박지성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화를 처음 신었다. 그가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의 사소한 실수 덕이었다. 학교에서 각 가정에 축구부 창단을 알리며 학생들이 축구부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글의 첫머리만 읽고 축구부 창단을 지지해 달라는 내용으로 알고 도장을 찍어 보냈다. 후에 박씨는 지성이가 축구부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한겨울 캄캄한 밤까지도 운동장에서 혼자 연습하는 아들을 보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98년 수원공고를 졸업할 무렵 박지성은 수원 삼성에 입단하고 싶었다. 구단은 박지성의 체력이 약하다며 테스트를 요구했다. 아버지 박씨는 아들을 위해 자기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보약까지 먹여 구단 테스트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박지성은 보름 만에 보따리를 싸야 했다.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동국대와 관동대에서 비슷한 이유로 입학이 무산되었다. 박지성에게는 크나큰 모욕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노력을 거듭했다. “오늘의 나를 만든 밑거름은 당시의 한(恨)이다”라고 박지성은 회고했다.



박지성은 가까스로 명지대에 입학했다. 올림픽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박지성은 하프라인부터 수비수를 여섯이나 제치고 50m 이상을 단독 돌파해 골을 뽑아냈다. 이 일로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다. 올림픽 대표였지만 학교에 돌아가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대학 선배는 “지성이는 제일 먼저 볼을 챙기고 청소도 시키기 전에 끝내놓아 선배에게 맞은 적이 거의 없다. 어찌 보면 꾀가 많은 후배였다”라고 말했다.



2000년 5월 박지성은 명지대 2학년을 휴학하고 일본 J리그로 진출했다. 최연소 해외 진출이었다. 국내 프로 무대를 거치지 않고 외국 생활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명지대 김희태 감독은 “특정 대학 출신이 아니고는 월드컵 대표가 될 수 없는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지성이가 J리그에서 뛴다면 월드컵팀에 합류하는 것이 쉬워지리라고 믿었다”라고 말했다.





연고주의 폐단 남았으면 발탁 안됐을 수도



김희태 감독의 말대로 국가대표는 핵심 선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연고와 파벌 등 인맥 위주로 선발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특히 고려·연세대 인맥 중심의 고질적인 연고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차범근 전 월드컵 대표팀 감독도 “1998년 당시 축구협회는 선수 선발 때 주위의 견해를 잘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런 난맥상은 선수들을 사적 이해 관계에 집착하도록 내몰았다. 히딩크가 도입한 능력주의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며 박지성은 자기 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미 J리그에 진출해 성공한 홍명보·황선홍·유상철과 비교해 박지성의 이름은 너무 미미했다. 일본 팬들도 박지성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소속 팀에서 뛴 2년 동안 박지성은 급성장했다. 이 때는 히딩크를 만나 집중 조련받은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중원을 휘어잡는 발군의 실력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러자 일본 언론이 그를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박지성이 J리그에서 공간을 읽는 넓은 시야와 빠른 판단력을 배웠다고 치켜세웠다. 다른 한국 선수에 비해 쉽게 공을 차는 것이 박지성의 장점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작 박지성 본인은 일본에서 경기 외적인 면을 배웠다고 여긴다. 일본 선수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은 나를 아주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활만 하다가는 왕따 당할 것 같아 오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재일 동포 축구 칼럼니스트 신무광씨도 “박지성은 한국과 일본 축구의 문화적 차이를 체득하며 소속 팀에서 팀 플레이를 위해 자신의 재능과 개성을 죽여왔다. 월드컵에서 박지성은 자신의 재능을 조금씩 발휘하고 있으며 그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박지성은 완고한 틀에 갇힌 한국 축구가 보듬기에는 힘든 선수였다. 성적만을 요구하는 한국 축구에서 그가 설 자리는 그리 넓지 않았다. 히딩크가 박지성을 발견한 것은 그 자신에게나 박지성에게나 큰 행운이었다.



1년6개월 동안에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화두를 지치지 않는 체력과 스피드로 정했다. 그리고 90분간 줄기차게 뛰는 기동력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멀티 플레이어를 찾았다. 2001년 1월 첫 만남에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았다. 박지성이 히딩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평소에 말수가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 여자 아이 같다. 하지만 그라운드에만 나가면 완전히 헐크로 변해 상대를 제압한다.”칭찬에 인색한 히딩크도 공격과 수비에서 자기 몫을 완벽히 해내는 박지성을 치켜세웠다. 특히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비며 상대를 조이는 압박 능력을 높이 샀다.



박지성은 히딩크호에 승선한 뒤 대표팀 기둥으로 쑥쑥 커나갔다. 박지성의 출전 여부에 대해 히딩크가 부상이 심하다고 연막 작전을 피운 것은 그의 팀내 비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월드컵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 한때 박지성은 탈락이 점쳐지기도 했다. 어느 언론에서는 ‘박지성이 탈락 1순위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부지런히 뛰기는 하지만 찬스를 만드는 능력과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2000년 9월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터뜨린 골이 박지성이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에서 올린 유일한 득점이었다.



탈락 예상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는 박지성은 “최종 엔트리에 들었다는 소식에 히딩크 감독이 정말 좋아졌고,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감독에 대한 믿음만큼 박지성의 연습 시간도 늘어났다.
비단 박지성뿐만이 아니었다. 히딩크에 대한 선수들의 전폭적인 존경과 믿음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주는 요소가 되었다. 솔직히 석 달 전만 해도 선수들은 자기들이 세계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동료는 물론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었다. 히딩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팀 만나도 당당히 맞설 자신 있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가진 순수함과 열정을 이끌어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선후배의 맹목적인 복종 관계와 나쁜 버릇 등 부정적인 요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갔다. 무모하리만큼 체력 강화에 집착했던 히딩크의 방식은 본선을 앞두고 빛을 발했다.



5월16일 대표팀은 유럽의 강호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유럽팀 징크스를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5월21일 잉글랜드전. 전문가들이 걱정한 대로 한국은 마이클 오언에게 쉽게 선제골을 내주었다. 선수와 기자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 골만 내주면 와르르 무너지곤 했던 과거가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박지성이 최진철의 패스를 헤딩슛으로 성공시키며 우려를 씻어냈다. 자신감을 얻은 대표팀은 체력을 바탕으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압박해 잉글랜드의 기를 죽였다.



세계 랭킹 1위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는 며칠 사이에 더 나은 기량을 선보였다. 한국은 전반전 10분 만에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트레제게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박지성이 있었다. 박지성은 15분 후 크로스 패스된 볼을 오른발로 트래핑하며 수비수를 간단히 제치고 벼락 같은 왼발 강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림 같았다. 그라운드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베르캄프의 우아한 볼 터치를 보는 듯했다. 아쉽게 2-3으로 패하기는 했지만, 한국은 세계 챔피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다.



강호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한국이 대패해 자신감이 꺾이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컸다. 축구협회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두 골 차로만 져도 성공이다. 언제 우리가 프랑스·잉글랜드 같은 강호들과 겨룰 기회가 있겠는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평가전을 계획했다”라고 말했다. 잉글랜드·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를 벌인 것은 한국팀에게 보약이 되어 본선에서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상대가 강호라고 해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또 평가전을 통해 박지성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했다. 박은 한국 축구의 숨은 잠재력을 일깨웠다. 그리고 문전 처리 미숙이라는 100년 묵은 고질을 그라운드 한구석에 꽁꽁 파묻어 버렸다.



체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해 월드컵 16강에 오르려는 대한 전사들에게 폴란드·미국은 물론 우승 후보 포르투갈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유럽팀만 만나면 맥을 못추던 한국은 어느덧 유럽 킬러가 되었다. 상대방은 한국의 속도와 힘에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강한 압박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1 대 1 기술이 떨어지는 한국 팀에게 상대팀을 철저히 압박해 공으로 재주를 부릴 상황 자체를 만들지 못하게 하도록 주문했다. 그 ‘족쇄맨’ 역할은 히딩크가 키워낸 송종국·김남일·최진철·이영표가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들은 과학적인 비디오 분석을 통해 상대방의 동선을 꿰뚫었고 스피드에서 상대를 압도했다.



송종국과 이영표는 몸값이 6천5백만 달러인 피구가 드리블하는 방향 한 발짝 앞에 있었고, 돌파당하면 붙잡고 따라가다가 볼만 정확히 걷어냈다. 송종국 뒤에는 최진철이 2중 방어망을 쳤다. 완벽한 커버 플레이였다. 오른쪽 세르지우 콘세이상도 마찬가지였다. 이영표는 김남일과 조화를 이루어 그의 진로를 봉쇄했다.



상대팀은 반칙이 아니고는 박지성 등 한국의 요주의 인물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박지성은 중앙선 근처에서 상대편의 집중적인 반칙에 시달려야만 했다. 포르투갈의 스트라이커 후앙 핀투는 박지성을 뒤에서 태클하다 레드카드를 받아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제 어떤 강호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맞설 자신이 있다”라는 박지성의 말처럼 한국 축구는 세계 수준에 올라섰다. 그리고 밝은 내일이 약속되어 있다. 한국팀의 주력 박지성·이천수·최태욱은 이제 스물한 살이다. 설기현·송종국이 스물셋이고, 스물두 살인 차두리도 있다. 대표팀과 함께 생활해온 최성국·정조국 등 무서운 10대들도 모두 주전급이다. 이들은 히딩크의 지도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나쁜 버릇들은 쉽게 버리면서 기량이 세계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들이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한국은 세계가 겁내는 팀이 될 것이다.



박지성의 골 세리머니는 독특하다.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하는 자세를 짓고 오른 팔을 뻗어 두세 번 가로 저은 후 두 팔을 쫙 벌린 채 그라운드를 내달린다. 그 의미에 대해 박지성은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내 실력을 보았는가. 놀라지 마라. 이게 전부가 아니다. 잔치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박지성이 어디까지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의 세기(細技)와 자신감이 성장하는 만큼 한국 축구도 성장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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