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폭탄’ 원조는 미국?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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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만·아프간에서 감손우라늄탄 사용” 주장 잇따라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만일 이곳 앞에서 약 2t 가량의 방사능 폭탄(일명 ‘더러운 폭탄’)이 터진다고 가정해 보자. 폭발로 인해 바로 옆에 있는 교육부·보건부 건물은 물론이고 연방항공청 건물까지 파손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건물 파괴보다는 폭발과 함께 발생할 방사능 오염 피해다.


백악관을 포함한 모든 관공서가 사실상 문을 닫는 것은 물론 내셔널 공항과 덜레스 국제공항도 폐쇄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의회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갈 것이며 공무원 수천명에게 귀가 조처가 발령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 일원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 연방정부가 말 그대로 문을 닫아야만 할 상황이다.


흡사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일이 진짜 벌어진다면? 지난 6월10일 미국 국민은 바로 이런 공포로 떨었다. 진원지는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의 말 한마디였다. 때마침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그는 CNN 생중계에서 “미국에 침입해 ‘더러운 폭탄’으로 테러 공격을 모의하려던 용의자 호세 파딜라 (아랍 이름 압둘라 알 무하지르)를 검거했다”라고 전격 발표했다. 그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방송과 신문은 온통 ‘더러운 폭탄’ 관련 보도로 홍수를 이루었다. 특히 1986년 대재앙을 가져온 옛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가 비교되면서 미국인들은 일순간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 국민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자 백악관은 애시크로프트의 발언이 과장되었다며 뒤늦게 진화에 나서는 등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4.5kg짜리 ‘더러운 폭탄’이 터졌을 때 20명 정도가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큰 문제는 방사능 오염이다. 그러나 핵 전문가인 게리 밀홀린은 “알 카에다의 방사능 폭탄 위협은 매우 과장되어 있다”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더러운 폭탄’ 테러 위협으로 미국 전역이 온통 법석을 떨었지만 과거 전쟁 수행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더러운 폭탄’을 사용한 나라가 실은 미국이다. 미국은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엄청난 방사능 오염을 동반하는 감손 우라늄(DU) 폭탄을 사용했으며, 최근 테러와의 전쟁 때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폭탄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손 우라늄이란 핵 연료의 우라늄이 핵분열을 마치고 남은 일종의 열화 우라늄이다. 감손 우라늄 폭탄은 외부 충격이 있거나 발화할 때 1,132℃의 고열을 내 순식간에 목표물을 파괴하며 해당 지역의 산소를 빨아들인다.


미국 국방부는 감손 우라늄의 정확한 피해 규모에 대해 침묵해 왔다. 그러나 과거 미국 국방부의 감손 우라늄 프로젝트 팀장을 지냈고 지금은 대학 교수로 있는 더그 로케 씨는 “감손 우라늄은 방사능 오염이 45억년이나 지속되는 유독 물질로서 세포 조직과 관련된 림프종과 신경 장애, 기억 상실을 일으킬 뿐 아니라 생식 체계 장애로 인한 기형아 출산 확률을 높인다”라고 주장했다.


미군은 1997년 이후 꾸준히 미사일 장착 폭탄을 개량해 왔는데 그 핵심은 탄두를 재래식 폭탄이 아닌 고강도 중금속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군사 전문가들은 문제의 중금속이 텅스텐 아니면 감손 우라늄인데, 파괴력이나 경제적 측면을 고려할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감손 우라늄 폭탄은 두께가 수 m가 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바위를 수초 안에 뚫는 가공할 파괴력을 자랑한다.


원래 미국 국방부는 1980년대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 시절 ‘앞으로 전투에서는 적의 지휘 센터를 먼저 괴멸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새로운 전략 개념에 입각해 그에 필요한 폭탄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지하 요새에 마련된 적의 지휘 센터를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핵폭탄이지만 국방부로서는 실전에서 사용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로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감손 우라늄 폭탄이었다.


미군이 감손 우라늄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했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심리학자인 다이 윌리엄스 씨다. 최근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와 미국의 탐사 전문 신문인 <빌리지 보이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윌리엄스 씨는 자신이 1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현지 답사해 작성한 약 1백30쪽에 걸친 ‘아프가니탄의 신비스런 금속탄 악몽’이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의료진과 국제 구호기관 종사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아프가니스탄이 감손 우라늄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오염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했다.





럼스펠드 “감손 우라늄, 알 카에다가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빌리지 보이스>는 미국이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에도 감손 우라늄 폭탄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특히 1994년 당시 육군장관이 의회 청문회에서 “감손 우라늄은 다른 천연 우라늄처럼 방사능 오염에 따른 신체 위해 요인을 안고 있으며, 과거 페르시아 만 전쟁 당시 교훈에 의거해 전투시 감손 우라늄에 미군이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대비책이 요구된다”라고 한 중언 내용을 보도했다.

워싱턴 소재 민간 정책집단인 ‘국방 대안 프로젝트’의 칼 코네타 소장은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도 감손 우라늄 폭탄 수백 개가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폭로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월 한 프랑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문제의 감손 우라늄이 캔터키 주의 한 공장에서 제조되었다고 폭로해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공장의 전·현직 종업원 10만여 명은 자신들이 회사측의 부실한 안전 관리로 인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감손 우라늄을 둘러싸고 ‘더러운 폭탄’ 시비가 일자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월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한 프랑스 잡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방사능을 발견했지만, 그것은 알 카에다 조직이 사용한 감손 우라늄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은 1987년 최초 컴퓨터 모의 실험을 거쳐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감손 우라늄 폭탄을 실전 사용한 데 이어 1997년 코소보 전쟁과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난해 10월 아프가니스탄 의사들의 말을 인용해 피해 환자들이 빈혈·폐질환·구토를 호소했는데, 이런 증세는 이들이 방사능 폭탄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반전운동가이자 웨인 주립 대학 교수인 프랜 쇼어 씨는 최근 한 반전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실전에서 사용한 ‘더러운 폭탄’의 방사능 오염 피해를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미국이 막상 자국 안에서 벌어진 ‘더러운 폭탄’ 용의범 검거 사건을 놓고 피해망상적 증세를 보이는 것이야 말로 희극이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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