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뚫어야 대륙이 열린 다
  • 상하이·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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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한국 기업들은 ‘고급’과 ‘최신’을 내세워 거대한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밀리느냐, 밀고 들어가느냐가 바로 이곳에서 결판 난다.
'화비산거(貨比三家:세 군데 가게에 세 번 찾아가서 비교해 보고 산다)’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상하이 사람들의 구매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많이 접해 보는 눈이 트인 상하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가 몸에 배어 있다.





5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부유층의 소비 행태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 바로 상하이다. 소비 수준으로 부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고소득자를 위한 사치스런 라이프 스타일이 정착하고 있다. 테너 가수 파바로티의 공연을 6천 위안(한화 약 90만원)을 내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품 전문 백화점에서는 8천 위안(1백20만원)이나 하는 휴고보스 양복이 팔린다. 지방 흡입 수술이 유행하고, 헬스클럽 회원권이 매진되는가 하면, 백화점 지하 슈퍼마켓에서는 애완 동물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난징루(南京路)는 소비 도시 상하이의 중심 이다. 대형 상가 100여 곳이 밀집한 난징루의 평일 유동 인구는 약 2백만명이다. 중국 유통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 지방 도매상들은 유행하는 상품을 구입해 중국 각지로 실어 나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징루에 한국 제품은 거의 전무하다. 진로·신세계백화점·코오롱 등 한국 기업이 13억 중국 시장을 노리고 상하이 상업 지역 곳곳에 진출했지만 대부분 비싼 수업료만 치르고 물러났다. 한국 기업들은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이용해 중국을 생산 기지로 삼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거대한 소비 시장 중국을 공략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삼성 애니콜·농심 신라면·오리온 쵸코파이 등 밀리언셀러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다수 제품은 고전하고 있다.



한국 주춤하는 사이 다국적 기업·중국 제품 협공



삼성물산의 한 현지 간부에 따르면, 실패 요인은 크게 두 가지. 먼저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다. IMF를 거치면서 기업들은 대부분 투자 시점을 놓쳤다. 특히 베이징을 비롯한 동북 3성에 집중되어 있던 투자를 상하이로 돌려야 할 시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국내 기업들이 중국 소비자의 구매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시장을 노리고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무차별 마케팅에 국내 기업들은 밀려났다.






한국이 주춤하는 사이 중국 제품의 도전도 거세어졌다. 삼성패션 상하이지점 권호석 수석대표는 “한국 제품을 모방해 맷집을 키운 이들은 이제 ‘차부뚜어(差不多·별 차이 없다)’라며 은근히 한국 제품을 무시한다”라고 말했다. 외국 제품이 위에서 짓누르고 밑에서는 중국 제품이 치고 올라오는 틈새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이 한국 제품의 현실이다. 한 상사 지점장은 “상하이의 가장 부유한 지역인 쿠베이신취에 형성된 코리아타운도 자리를 내주어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상하이의 한류(韓流)도 한국 제품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동북 3성에 비해 이곳에는 한류가 상대적으로 늦게 상륙했다. 홍콩·타이완·일본 문화를 두루 접했던 상하이 청소년들은 한류에 대해 동북 3성처럼 뜨겁게 반응하지 않았다. 한·중 합작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민씨(35)는 “이대로 가면 한류도 중국이라는 문화의 용광로에 녹아 그대로 흡수되어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한류를 베낀 중국 가수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79쪽 상자 기사 참조). 트집 잡기 좋아하는 상하이의 기성 세대는 한류를 끝없이 폄하했다. 월드컵 기간에 한국을 방문한 <상하이바오(上海報)> 기자들은 ‘한류는 가짜였다. 서울은 성형 수술을 해서 똑같이 생긴 여자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곳이다’라는 비난 기사를 송신했다.



한국 제품과 한류, 모두 수세에 처했지만 상하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미래의 중국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하이 시장을 반드시 뚫어야 한다. 상하이에서의 성패 여부가 중국 시장 전체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시안(서안)은 중국의 과거를, 베이징은 중국의 현재를, 상하이는 중국의 미래를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상하이는 ‘중국 표준’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중국에서 사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콴시(關係)도 상하이에서는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은 활 모양의 해안 지역과 화살 모양의 양쯔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는 여기서 화살촉에 해당하는 곳이다. 중국 정부는 용두론(龍頭論)으로 상하이 발전 계획을 요약한다. ‘용의 머리를 자극함으로써 몸통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상하이를 중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확보하려는 세계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세계 500대 기업 중에서 3백여 개가 상하이에 중국 본사를 두고 있다.



상하이의 한국인 기업가들은 상하이가 가장 까다로운 사업 지역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쉬운 지역이라고 말한다. 한 번 신용을 쌓아두면 이후에는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표준이 만들어지는 상하이에서 물러서면 길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다행히 2000년 이후 나타나는 상하이의 새로운 변화는 한국 제품과 한류에 또 한번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기성 세대는 브랜드, 청소년은 유행 선호



제일 먼저 주목할 것은 ‘중화의 역설’이다. 무분별한 복제 덕분(?)에 지금의 성장을 이루었지만 국산품에 대한 중국인들의 비하 의식은 대단하다. 중화는 또 다른 중화를 찾고 있었다. 자신들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중국은 또 다른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상하이에서 살아 남은 기업들은 대부분 소중화를 표방한 기업들이었다.



고가 전략을 편 스포츠 의류 업체 라피도는 상하이에서 나이키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남성복 갤럭시도 마찬가지다. 쉬자훼이 동방백화점 신사복 매장에서 갤럭시는 세계 유수 업체를 제치고 가장 목이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현지인의 기호에 맞추지 않고 매운 맛을 강조한 농심 신라면도 차별화에 성공해 고가에 팔리고 있다. 한국 직원들에게 중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직원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한 포스코는 오히려 일류 직장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유행이 소비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성 세대는 브랜드 선호가 강하지만 젊은 여성이나 청소년은 브랜드보다 유행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상하이의 양대 쇼핑가는 난징루와 화이화이루이다. 특히 난징루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상가 지대로 ‘베이징에서는 톈안먼 광장에 가고, 광둥에서는 요릿집에 가고, 상하이에서는 난징루에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난징루가 남대문 시장이라면 화이화이루는 압구정동에 해당한다. 세계 명품만 판매하는 메이메이 백화점을 비롯해 화이화이루에는 고급 옷가게가 늘어서 있다.






그러나 난징루나 화이화이루가 더 이상 상하이 패션의 맹주는 아니다. 상하이 패션 1번지는 난징루에서 고급 제품을 파는 화이화이루로, 다시 최신 유행 상품을 파는 샹싱청·시앙양·쉬자훼이 등 젊음의 거리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쉬자훼이에서 커플룩을 입고 쇼핑을 즐기는 쉬에(29)와 우(25) 씨의 쇼핑 취향은 상하이 패션의 중심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쇼핑 지역을 난징루에서 화이화이루로 바꾼 그들은, 올해 들어 다시 쉬자훼이로 쇼핑 장소를 바꾸었다.



상하이 소비자를 붙잡는 두 가지 코드는 ‘고급’과 ‘최신’이다. 이 점에서 한국 드라마나 한국 댄스 가요를 통해 이미지 효과를 보고 있는 한국 제품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중국 제품과 차이가 없더라도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충분히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상하이 한인회 정희천 부회장은 “안재욱을 모델로 내세운 777 구두는 지금 백화점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도 ‘한류 이삭 줍기’를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한국 브랜드 합종연횡해 ‘한류 백화점’ 열 예정



한류와 한류 마케팅이 결합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소비의 핵심에 1978년 산아제한조치 이후 태어난 ‘소황제’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화점이나 쇼핑 지역에서 쇼핑을 즐기는 사람은 대부분 소황제들이다. 정씨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노래를 듣는 이들이 가장 주목되는 소비자라는 사실을 십분 이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한류도 아직까지는 유효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푸단 대학에 유학한 야마모토 데베(25) 씨는 “중국 가수들이 한국 가수들을 따라 하더라도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반항끼이다. 중국 가수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수세에 몰린 한국 기업들이 다국적 기업의 무차별 공세를 막기 위해 합종연횡을 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한류 백화점이다. 한류에 힘입어 권토중래를 꾀하는 이들이 내민 한류 백화점 카드는 한류와 한국 제품을 결합한다는 것이 기본 구상이다. 한류 백화점의 영업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4층에는 한국 브랜드 상품으로 명품관을 꾸며 고가 시장을 공략하고, 2∼3층에는 동대문 쇼핑몰의 최신 유행 스타일을 들여와 유행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오는 9월에 백화점은 전체 매장의 70%를 한국 제품으로 채울 계획이다. 이 백화점 야외 무대에서는 매주 한류 이벤트가 펼쳐질 예정이다. 일향백화점을 운영하는 썬워즈(Sunwards)의 노광선 마케팅 이사는 “6층에 한국 음악만을 트는 록카페를 만들어 중국 소비자들을 끌어 모아 '샤워 효과'를 볼 수 있게 하겠다”라고 말했다.



밀고 들어가느냐, 밀려나느냐? 현지 교민들은 한류 백화점의 성패 여부가 한국 상품이 상하이 시장에 진출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류 백화점의 모기업인 썬워즈 사의 이름과 일향(日向)이라는 백화점 이름은 모두 태양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썬워즈가 만리장성을 뚫고 중국 시장을 열어젖뜨릴 수 있을지 상하이 교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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