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이 대선 판도 흔들 것” 72.2%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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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도 참 딱하다. 또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올 생각이었으면 두 아들을 자진 입대시켜서라도 일찌감치 병역 문제를 해결했어야지…”
이후보를 지지한다는 한 사업가가 한 말이다. 그의 말에는 5년 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이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 문제를 소홀하게 처리한 데 대한 비난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100여 일 앞두고 대선 정국은 또다시 ‘병풍’ 공방에 휘말려 있다. 그런데 상황은 5년 전보다 더 심각하다. 그때는 병역 면제를 둘러싼 정치 공세만 오갔지만, 지금은 검찰 수사로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이미 ‘병풍’의 막강 위력을 실감했던 정치권이 사생결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정작 유권자인 국민들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병풍 정국에 대해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시사저널>은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 리서치’와 함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8월29일과 30일, 전국 유권자 1천28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표본 오차는 ±3.1% 포인트.
우선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1.2%가 ‘부정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당하게 면제받았을 것’이라는 응답은 9.5%에 불과했다.


모든 계층에서 ‘부정하게 면제받았을 것’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인 가운데, 특히 20대(70.2%)와 30대(69.5%), 화이트칼라(70.7%)와 학생(78.5%), 충청권(68.2%)과 호남권(82.6%)에서 ‘부정 면제’ 응답률이 높았다.
‘정당하게 면제받았을 것’이라는 응답은 50대(15.9%)와 농업·임업·어업 종사자(16.3%), 대구·경북(15.7%), 부산·울산·경남(19.4%)에서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모두 10%대에 그쳤다. 특히 이회창 후보 지지자 가운데에도 ‘부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응답(36.3%)이 ‘정당했을 것’이라는 응답(18.5%)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29.3%였는데, 주로 한나라당과 이후보 지지자 사이에서 나왔다. 그만큼 이후보 지지층에서도 이후보의 결백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다.


이렇듯 국민 여론이 ‘부정 면제’ 쪽으로 기운 것은 이제까지의 병풍 진행 과정에서 부정 면제를 주장하는 쪽의 증거나 증언은 구체적인 반면, 이를 반박하는 증언이나 증거는 적거나 설득력이 떨어진 탓으로 해석된다.


46%가 “병풍 공세는 민주당의 정치 공작”


부정 면제가 있었으리라는 여론은 결국 이회창 후보 부부가 이 문제를 직접 해명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이어진다. ‘이회창 후보와 부인 한인옥씨가 아들의 병역면제 파문에 대해 직접 해명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1.4%가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1.6%로 공감한다는 주장의 절반에 그쳤다.


수도권에서는 ‘이후보 부부가 해명해야 한다’와 ‘그럴 필요 없다’는 응답이 6 대 4(서울), 7 대 3(인천·경기) 정도로 나뉘었다. 이후보 지지자가 많은 영남에서는 무응답이 10%나 되어 5 대 4로 나왔다. 보수성이 강한 강원과 제주에서 ‘직접 해명’을 요구하는 응답이 80%가 넘게 나온 것이 눈에 띈다. 지지 정당이나 지지 후보가 없다고 밝힌 응답자들 사이에서도 6 대 3 정도로 ‘직접 해명’이 우세했다.


한나라당 지지자 가운데는 ‘직접 해명’이 48.7%로, ‘그럴 필요 없다’는 43.7%보다 약간 우세했고, 이후보 지지자들은 46.2% 대 44.9%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하지만 이후보 부부가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는 일은 없을 전망이다. 가능하면 이후보와 병역 문제를 분리하는 것이 낫다고 한나라당이 전략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각 방송사에 ‘이정연씨 이름 앞에 이회창 후보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쓰지 말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이후보와 병역 문제를 최대한 분리하려고 애쓰고 있다(34쪽 기사 참조). 그동안 사찰 방문 등 나름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던 한씨의 내조 활동도 병풍 공방이 확산되면서 뜸해진 상태다.


이에 앞서 이후보는 8월7일 기자회견에서 “내가 만약 아들의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불법이나 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있다면 후보 사퇴는 물론 정계를 떠나겠다”라고 말했다. 한인옥씨의 개입설에 대해서도 “아내가 한 일을 내가 모를 리 없다. 우리 가족 중에 연루된 사람은 없다”라고 못박았다. 한씨 역시 남경필 대변인을 통해 “법관의 딸로 태어났고 법관의 아내로 40여 년을 살아왔는데, 청탁을 하면서 돈을 건네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라고 개입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5년 전 병역 의혹에 관한 한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던 데 비하면 상당히 적극적으로 대응한 셈이다. 그러나 해명 내용이 단지 ‘문제 없다’를 강조하는 데 그쳐,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검찰 수사 공정성에는 의견 갈려


국민들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면제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물고늘어지는 여권의 ‘병풍 공세’에도 뭔가 치밀한 작전이 숨어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우선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수사가 여권의 정치 공작이라는 한나라당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공감한다’가 46%로, ‘공감하지 않는다’ 44.2%보다 많았다. 비록 오차 범위 안에서의 우세지만, ‘병풍은 여권의 정치 공작’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주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대체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공작이다’ ‘아니다’가 연동되는데, 유독 30대에서 53.3% 대 42.1%로 ‘공작’이라는 답변이 많고, 반대로 60세 이상에서 35.9% 대 40%로 ‘공작이 아니다’라는 답변이 많은 것이 이채롭다. 비록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치이기는 하지만, 호남에서조차 3명에 1명꼴로 병풍이 여권의 공작이라고 응답했다.





검찰 수사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여론의 의심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진행중인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면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얼마나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39.2%가 ‘공정하다’고 응답했고, 37.9%가 ‘불공정하다’고 대답했다. 역시 오차 범위 안에서 ‘공정하다’는 의견이 약간 우세하지만, 병역 면제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여론이 60%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검찰 수사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비판적인 셈이다. 검찰이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외쳐도 국민들은 여전히 검찰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병풍이 공작인지 여부에 대한 응답과 검찰의 공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은 상관 관계가 매우 높았다. 병풍이 여권의 공작이라고 보는 사람은 검찰이 불공정하다고 보았고, 병풍이 여권의 공작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검찰 수사가 공정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30대는 병풍이 여권의 공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검찰 수사는 공정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많은 데 반해, 박근혜 의원 지지자들은 병풍이 여권의 공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검찰 수사는 불공정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검찰 수사의 공정성’과 관련해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은 호남에서 ‘모름 또는 무응답’이 25.6%나 된다는 점이다. ‘병풍의 공작 여부’나 ‘이회창 후보 부부의 직접 해명 여부’를 묻는 항목에서도 호남 사람들의 무응답률은 매우 높았다. 전통적으로 무응답률이 낮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DJ 정권과 민주당에 유리한 쪽으로 답변이 쏠리던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이에 대해 미디어 리서치 김지연 차장은, DJ 정권과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응답 유보층이 늘어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병풍 정국에 대한 국민 여론을 종합하면 ‘병역 비리는 있었을 것이나 현재의 병풍 공세나 검찰 수사 역시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국민들이 병풍 정국에 대해 상당한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대선 후보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이냐’를 조사한 대목에서는 압도적 다수(72.2%)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응답 24.4%에 비해 3배나 많은 수치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대선 판도 자체가 완전히 뒤집힐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풍 수사를 막으려고 하는 것이나, 반대로 민주당이 어떻게든 병풍에 부채질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의 당락을 좌우했던 ‘병풍’이 5년이 지나서도 어김없이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태풍’에는 소멸기가 있지만, ‘병풍’에는 소멸 시효가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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