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 있게만 해 달라 더 바라지 않는다”
  • 글·고제규 사진·이상철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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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더미에 묻힌 도로 곳곳은 끊겨 있고, 강물에 떠내려온 소가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었다. 사상 최악의 수마가 덮치고 간 강릉·동해 지역 수해 현장은 참혹했다.
강은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수마가 할퀴고 간 상흔은 그대로다. 뿌리까지 뽑힌 옹골찬 나무, 종잇장처럼 찢긴 아스팔트. 그래서인지 강가에 널부러진 옷가지들도 쓰레기더미로 보였다. 9월5일 동해시 신흥천은 난데없이 빨래터로 바뀌었다. 동해시 삼화동 수재민들이 물에 잠긴 옷가지를 빨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신흥천에서, 그들은 절망을 씻어내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말로 ‘삼바사슴’을 뜻하는 태풍 루사는 큰 상처를 남겼다. 2백21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산 피해액이 5조원을 넘었다.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9월7일 현재 강원도에서만 41개 마을이 고립되어 시간이 갈수록 피해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강릉과 동해 피해 지역을 찾았다. 9월4일 강릉시는 황색 도시로 변해 있었다. 시 전체가 먼지에 뒤덮였다. 폭우로 상수도관이 유실되면서 수돗물이 끊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 뒤에 폭염까지 닥쳤다. 34℃가 넘는 무더위에 강릉은 푸석푸석 메말라 있었다.


시내에서 노암동과 강남동은, 강릉시를 가로지르는 남대천이 인접해 큰 피해를 보았다. 수재민 2백50여명이 노암초등학교와 경포중학교로 대피했다. 대피소는 낮 동안 노인들과 아이들 차지다. 밤 10시가 되어야 복구를 마친 주민이 돌아와 잠을 청한다. 복구마저 포기한 경우도 많다. 노암동에 사는 진금화씨(45)는 두손을 들었다. 천만원짜리 전셋집이 무너졌고, 그녀의 일터였던 실내 포장마차마저 사라졌다. 아들 추성욱씨(21)는 시에서 나누어준 피해 조서를 보고 군대행을 결심했다.




형식적인 피해 조서를 보고 보상에 대한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가전제품의 가격을 일일이 적으라고 했다. 공무원들은 앉아서 이런 식으로 피해 규모를 집계할 것이다. 그게 전부다. 나중에 보상금 40만∼50만원을 주면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추씨는 말했다. 대학 1년생인 추씨는 등록금 마련도 어렵겠다며 입영희망원을 냈다. 덮고 지낼 이불 하나 건지지 못하고 몸만 빠져나온 모자는 초등학교 마룻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했다. 이 날까지 이들에게 담요 한 장 지급되지 않았다.


수해 보상 기대 접고 차라리 군대행


9월5일 아침 6시, 강릉에서 동해로 통하는 7번 국도가 복구되었다. 동해로 향하는 7번 국도가 아침부터 붐볐다. 동해가 가까워지면서 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7번 국도에 인접한 강릉시 월호평동 입구에는 영동선이 뚝 끊겼고, 강물에 떠내려온 소가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었다. 복구 손길이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수재민에게 하루는 길다. 9월5일 아침 8시부터 강릉시 강동면 대동2리에 중장비 소리가 요란했다. 대동2리는 군성강이 범람해 1백30세대 전체가 물에 잠겼다. 중장비 소음 사이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한 주민이 자신의 집에만 군인들이 적게 배치되었다며 이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목이 잠긴 신무선 이장(59)은 “워낙 피해가 커서 그렇다”라고 이해했다. 이런 실랑이는 수해 현장에서 흔한 풍경이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대동2리에서만 4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유복 할머니(62)는 손녀와 며느리를 한꺼번에 잃었다. 자동차를 타고 피하다 불어난 물살에 쓸려갔다. 손녀 염은미(7)와 염은희(4) 그리고 며느리 박경숙씨(35)의 사진을 보며 김유복 할머니는 피눈물을 쏟았다. 실종 5일 만에 며느리는 시체라도 찾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녀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딸과 아내를 잃고 몸져 누운 아들을 대신해, 김할머니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천장까지 들어찬 진흙을 퍼냈다.


9월5일 오전 10시40분, 동해시청은 헬리콥터 소리로 요란했다. 이 날까지 신흥동·비천동·달방동이 고립되었다. 경찰과 군용 헬기가 5분 간격으로 오르내리며 고립 지역으로 생필품을 날랐다. 40여 가구가 고립된 승지골로 향하는 헬리콥터에 올랐다. 하늘에서 본 수해 현장은 처참했다. 2000년 동해·삼척 산불과 수해 피해는 무관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자, 산불로 민둥산이 된 곳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다. 도로가 순식간에 흙더미에 묻히고, 전신주가 쓰러졌다. 승지골은 전기와 전화마저 불통된 채 완전 고립되었다. 승지골 주민 대부분은 노인이어서, 헬리콥터로 실어 나른 라면과 생수·쌀을 가져갈 수도 없었다. 젊은이 8명이 등짐을 져서 구호품을 날라주었다. 나선근씨(26)는 “이 정도 생필품이라면 급한 대로 허기는 달랠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쓰레기 싣고 청와대 가자”


9월5일, 동해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삼화동은 4일 만에 고립에서 벗어났다. 신흥천이 범람해 2백50가구 5백명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았다. 전기와 수도와 도로가 끊기자 이재민들은 4일 동안 공포에 시달렸다.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라면 하나로 하루를 보냈다. 밤에는 삼화초등학교에서 신문지를 깔고 잠을 청했다.




9월4일 막혔던 도로가 뚫리면서 수해 현장의 ‘푸른 천사’ 군인들이 달려왔다. 군인들은 작전을 수행하듯, 일사불란하게 복구에 나섰다. 그런데 일부 주민들이 군인들의 도움을 거부했다. 삼화동이 특별재난지역에서 벗어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이 반발했다. 삼화동 3통에 사는 전경숙씨(50)는 “쓰레기를 치우지 말고, 청와대로 싣고 가자는 말이 돌고 있다”라고 말했다. 임시 주민대책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백국현씨는 “정부 대책을 지켜보고 행동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영세민이 밀집한 삼화시장 쪽은 피해가 더 컸다. 오래된 집들은 무너졌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굴삭기가 작업할 수도 없었다. 이런 곳은 여지없이 군인들 몫이었다. 군인들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군부대는 먹거리도 자체 해결했다. 수중 폭탄을 맞은 꼴이 된 삼화동은 복구하는 데만 한달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가위가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것이 더 고통스럽다.

변변한 제상 하나 차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재민의 요구는 한결같다. “살 수 있게만 해달라. 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 규모가 워낙 크고, 정부의 재난 예산도 바닥 난 상태여서 ‘체감 보상비’는 낮을 수밖에 없다(62쪽 딸린 기사 참조).
9월6일 영동 지역에 다시 비가 내렸다. 빗줄기 속에서도 절망을 털어내는 복구 작업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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