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강 석양 아름다운 은퇴자들의 낙원
  • 태국 농카이·박순철 편집위원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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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경 도시 농카이는 나른하고 평화롭다. 이 외딴 도시에 언제부터인가 외국인 여행객들이 모여들더니 지금은 장기 체류자만 100여명에 이른다.
은퇴한 노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말년의 고독과 여유를 즐기고 있다.



오후 5시 열대의 햇볕은 여전히 강렬했다. 강변 식당의 종업원은 파라솔을 완전히 땅에 뉘어 기울어가는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강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방콕에서 낮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걸렀던, 늦은 점심에 곁들여 마시는 찬 맥주 맛은 각별했다. 이곳 태국 동북부 이산 지방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창’(코끼리) 맥주였다.


밥에 얹어 먹기 위해 시켰던, 굴 소스에 쇠고기와 양파·파·감자를 함께 볶은 요리는 안주로도 제격이었다. 댕이라는 이름의 젊은 웨이터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 왔으나 내 짧은 태국어로는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이곳 외진 국경 도시 농카이를 찾는 외국인은 대부분 서양 사람들이었다.





강 건너에는 라오스의 정글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강가에 드문드문 서 있는 건물들 가운데 녹색 숲을 배경으로 한 붉은 지붕의 이층집이 특히 눈에 띄었다.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진부한 표현이 저절로 떠오르는 평화스런 풍경 속에는, 그러나 이 내륙 국가의 지독한 가난이 감춰져 있었다.
가난은 메콩 강의 이 쪽에서도 마찬가지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1인당 GNP 3백 달러로 추상화한 라오스의 가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적어도 통계로는 10배 정도 잘사는, 그런 나라 속의 상대적 빈곤이다.



아시아에서 은퇴자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



이산 지방은 소외받고 있는 땅이다. 인구·면적에서 태국의 3분의 1쯤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 사회의 어두운 뒷전에 밀려나 있다. 외국인 여행객들의 경우에도 극성스런 서양 배낭족을 제외하고는 방콕으로 대표되는 중부, 치앙마이와 푸켓의 이름부터 떠오르는 북부·남부와 달리 찾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가난한 곳은 물가도 그만큼 싸다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다. 물가가 싸다는 것은 일정한 소득이 없거나 넉넉지 않은 연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인들에게는 작지 않은 매력이다. 은퇴자들을 독자층으로 삼는 특수지이기는 하지만 2천만 부 이상을 발행해 세계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미국의 잡지 <모던 머추어리티>가 농카이를 아시아에서 은퇴자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에도 싼 물가가 있었다(105쪽 상자 기사 참고).



월드컵 이야기를 하려 애쓰던 댕에게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98 밧이었다. 1 밧은 30원이 채 안 되니까 3천원이 조금 못 되는 금액이었다. 이곳 나름으로는 고급 음식점에서 맥주 한 병, 쇠고기 볶음 한 접시, 밥 한 공기, 라오스 커피 한 잔을 먹고 마신 값이었다. 110 밧을 주자 댕이 합장을 하면서 기뻐했다.



태국 음식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30년 정도밖에 안된다. 그렇지만 벌써 이 나라의 음식을 중국·프랑스·이탈리아와 동렬에 놓고 평가하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이산 지방의 음식 가운데도 그린 파파야를 주 재료로 하는 샐러드인 솜땀, 돼지고기를 다져 양파와 고추에 볶은 무삽, 닭을 튀긴 까이양 같은 요리는 이미 외국인들 가운데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농카이에서는 생선 요리가 그럴듯하다. 다음날 라오스를 오가는 보트들의 선착장이 있는 타사뎃의 시장 거리를 거닐다 보니 서울의 청진동 뒷골목처럼 석쇠에 생선구이를 해 파는 곳이 보였는데 이글이글 타는 숯불 위에 소금을 뿌려 굽는 생선들이 아주 먹음직해 보였다. 돔같이 생긴 생선 한 마리를 시켰는데 하도 커서 재어보았더니 길이가 한 뼘 반이나 되었다. 값은 100 밧.





인구 3만 명도 안되는 이 작고 외딴 도시에서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은 많지 않다. 중국 음식이나 일식을 먹을 데는 있지만 한식은 구경할 수도 없다. 양식을 먹을 만한 곳도 드물다. 영어가 통하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데니시 베이커’에 서양 사람들이 모여 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데니시 베이커는 테이블이 10개도 안되고 에어컨도 없는 작은 식당이었지만 해가 지자 바람이 시원했다. 식당 앞 2차선 도로에는 이곳의 택시인 뚝뚝(오토바이 엔진을 단 3륜차), 버스 구실도 하지만 택시처럼 아무 데나 가기도 하는 쏭테오(트럭의 짐칸을 개조해 두 줄로 마주보는 좌석을 마련한 것), 트럭, 오토바이 등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갔다.



이 식당의 동업자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50대 중반의 덴마크인 카이 폴마는 자기가 이곳에 처음 온 6년 전만 해도 외국인 체류자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숫자가 100명 정도로 늘어났다.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에서 찾아 온 연금 생활자들이고 아시아인은 없다고 했다. 지난해 겨울, 지병 때문에 고통받던 한국의 저명한 재야 인사가 부인과 함께 석 달쯤 머물렀을 뿐이다.



“이곳에 사는 이유가 뭔가?” 카이는 첫째로 싼 물가를 꼽았다. 가구가 마련되어 있는 주택이 월세 4천 밧 내외, 아파트가 4천 밧에서 6천 밧이라고 했다. 예쁜 양옥집에서 살아도 낭비만 안 하면 한 달 생활비 1만 밧 남짓으로 살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로 그는 비자 문제를 들었다. 비자 기한이 끝나는 석 달마다 한 번씩 강 건너 라오스에 갔다 오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었다. 농카이를 찾는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운 독신 남자들로 술집에서 만나는 태국 여인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생활과 노년의 외로움을 잊게 해 줄 반려자를 함께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사랑은 파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딱한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태국 사람들은 농카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흘째 되는 날 낮 나는 영어책을 판다는 책방을 찾아 메콩 강과 나란히 뻗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밝은 주황색 승복을 걸친 젊은 스님이 보이기에 주섬주섬 아는 태국어 단어들을 동원해 와삼베라는 이름의 서점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딱하다는 듯이 유창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책방은 바로 그 스님이 서 있던 자리에서 강 쪽으로 뻗어 있는 또 하나의 샛길에 있었다. 그 곳에는 일종의 주택 단지처럼 낡은 목조 2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가운데 난 좁은 길은 빗물이 잘 빠지지 않는지 발목까지 젖을 정도로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 목조 가옥 가운데 서점이라고 작은 팻말을 붙인 집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30대 태국 여인 한 사람이 정물화처럼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국·동남아·불교에 관한 중고 서적들과 엽서, 그리고 곁다리로 토산품 등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몇 마디 물어 보았더니 그는 걸상을 끌어다 앉기를 권했다.



올백 머리가 어딘지 고집스레 보이는 사라냐는 방콕의 어느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농카이를 좋아하는 이유로, 그녀는 우선 주거비가 싸다는 것과 비자 연장이 쉽다는 점을 들었다. 카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또 하나의 이유로 외국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태국 정부가 까다롭지 않아 살기에나 비즈니스 하기 편하다는 점을 들었다.




물가 싸고 비자 연장 쉬운 데다 로맨스까지



“그렇다면 당신은 왜 여기를 택했는가?” 사라냐는 스트레스가 없고 공해도 없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메콩 강 옆에 살 수 있어 좋다”라고 덧붙였다. 메콩 강 때문에 농카이가 좋다고 대답한 것은 근처의 비교적 큰 도시인 우돈타니 출신 대학생 야이도 마찬가지였다. 강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말을 걸어온 공무원이라는 사내도 같은 말을 했었다.



이 외진 국경 도시를 국제적으로 이름 나게 한 최초의 사건은 1994년 메콩 강 위에 태국과 라오스를 연결하는 ‘사판 미타팝’(우정의 다리)을 준공한 것이었다. 이 다리는 농카이에서 메콩 강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2차선 차도 가운데 철로가 놓여 있지만 아직까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이 다리를 천천히 걸어가 보았더니 다리 중간에 맨홀 공사할 때 행인들을 막는 것처럼 생긴, 나지막한 차단 장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 태국과 사회주의 국가 라오스를 차단하는 국경 표시의 전부였다.



다리 아래에는 우기의 메콩 강이 황토색 물을 가득 안고 도도하게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가끔 큰 나무들도 상류의 홍수를 알리듯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중국의 서남부 성들을 거쳐 미얀마·라오스·태국 땅이 만나는 ‘황금의 3각 지대’를 거쳐 달려온 메콩 강은 캄보디아의 삭막한 땅을 지나 베트남의 남부 델타 지방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농카이에는 관광객들이 들를 만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16세기에 라오스에서 옮겨온 유명한 불상을 모신 왓포차이를 비롯한 여러 곳의 불교 사원, 힌두교와 불교의 거대하고 기괴한 조각상들을 볼 수 있는 살라 캐오 쿠가 대표적인 명소다. 주변 몇십 km 내에도 큰 사원과 폭포처럼 관광객을 유혹하는 곳이 적지 않지만 특히 강 건너 라오스 땅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체류하려는 은퇴자들에게는 관광 명소보다는 믿을 만한 의료 시설이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장소가 훨씬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는 이곳의 시설 좋고 싼 골프장을 자랑하는 글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어쩌면 이 모든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나이 많은 외국인들에게도 매우 안전하다는 사실이다.





이국 땅에서 부르는 귀거래사



떠나기 전날 밤 나는 데니시 베이커의 동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60대 중반의 데릭 셔윈을 만났다. 그는 식료품점에서 스카치 위스키 한 병을 사더니 같이 강변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전에 영국 BBC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PD와 작가로 오래 일했던 그는 농카이에 정착한 지 2년이 되었다. 장소를 옮긴 우리는 또 한 병의 위스키를 땄다. 그날 밤 나는 이야기와 술에 만취해 뚝뚝을 탔으나 다음날 아침 내 방에서 무사히 일어났다. 농카이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입증한 셈이었다.



한국도 이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은퇴한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새로운 숙제이다. 서양인들처럼 외국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보겠다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생각 자체가 낯선 것이 사실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고령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떠나는 시기가 아니라 고향의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는 때다.



방콕으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데릭에게 €e메일을 보냈다. ‘농카이의 평화가 부럽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방콕의 흥분도 필요한 것 같다.’ 사실 방콕만 해도 내게는 하나의 타히티 섬이다. 더욱이 농카이는 분명 한국인에게 낙원은 아니다. 하지만 졸고 있는 듯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면 이내 메콩 강변에 도달할 수 있는 작은 국경 도시의 강변 식당에 앉아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그리고 매혹시키고 있는 그 큰 강의 흐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인간의 삶과 역사, 그 생멸을 생각해 보는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 그리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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