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없는 아이는 불행한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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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이는 왜곡된 가부장적 가족 제도로부터 자유로워 ‘혈연 문화 퇴색’을 몰고올 수도 있다. 2촌 관계가 무너지고 있는 21세기 한국에서는 외동이의 경쟁력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형제 없는 아이요? 아무래도 티가 나죠.” 서울 ㅅ초등학교 교사 김윤정씨(30)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이렇게 답했다. 제멋대로다, 고집이 세다, 자기중심적이다…. 외동아들·외동딸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교사도 갖고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김씨의 답변이다. “말수가 적고 발표력이 떨어지는 아이가 많아요. 이에 비하면 형제 있는 집 아이들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리더십도 뛰어난 편이죠.”





대학생·대학원생을 주로 상대하는 함인희 교수(이화여대·사회학) 또한 형제 없는 아이는 티가 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이 글에서 ‘형제’는 형제자매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딴판이다. “외동이들은 자기 주장이 분명한 경우가 많아요. 똑부러지죠.” 대신 외동이에게서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함께 차를 마시고도 찻잔을 씻겠다고 일어나는 쪽은 대부분 형제 속에서 부대끼며 자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숫기가 없거나 똑부러지거나, 과연 어느 쪽이 외동이의 진실일까? 아니, 그보다도 과연 형제가 있고 없음에 따라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 사회성 따위에 차이가 생기기는 하는 것일까?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형제 관계는 부모-자식 다음으로 가까우면서도 늘 미묘한 갈등을 수반해 왔다.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은 이같은 형제 관계의 원형을 보여준다. 표면상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해 온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에서도 속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흥부와 놀부, 콩쥐팥쥐를 비롯해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염상구 형제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기질과 세계관을 지닌 형제 간의 갈등은 고금의 문학 작품이 즐겨 다룬 소재였다. 형제 간의 우애를 다룬 고전 소설(‘우애 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조춘호 교수(경산대·국문학)는 “우애를 강조한 소설이 그토록 많이 등장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형제 간에 우애를 지키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을 반증한다”라고 지적했다.



현실 세계에서도 형제가 다투는 얘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흥밋거리였다. 최근 한 재벌가에서 벌어졌던 왕자의 난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앞으로 드물어질 것 같다. 형제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현재 우리나라 기혼 여성의 평균 자녀 수는 2.5명. 그러나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평균 자녀 수는 크게 줄어드는 추세이다(오른쪽 표 참조). 통계청이 발표한 연령별 평균 자녀 수를 살펴보면 25∼29세가 1.1명, 30∼34세가 1.7명, 35∼39세가 1.9명, 40∼44세 2.0명이다. 도시에 살수록,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평균 자녀 수는 더 줄어든다. 도시 지역의 기혼 여성은 시골 지역 여성보다 자녀를 평균 1.3명 덜 낳으며(도시 2.3명>읍 단위 2.8명>면 단위 3.6명), 최종 학력이 대학원 졸인 여성은 중졸 여성보다 자녀를 0.9명 덜 낳는다(대학원졸 1.5명>대졸 1.6명>고졸 1.9명>중졸 2.4명).
특히 서울은 전국에서도 가장 빠르게 형제가 사라지고 있는 지역이다.


40대 이하 젊은 기혼 여성(25∼39세) 집단을 보면 이같은 현상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서울에 이 연령대 여성 100명이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중 15명은 자녀가 없고, 29명은 형제 없는 아이, 곧 외동이를 기르고 있다. 이에 비해 두 자녀를 기르는 여성은 51명, 세 자녀를 기르는 여성은 5명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이미 세계 최저 수준에 이르렀다는 출산율이 더 떨어질수록 자녀를 두지 않거나 외동이를 기르는 여성의 비율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82~83쪽 딸린 기사 참조).



그렇다면 형제 관계 축소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일단 개인 수준에서 형제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린 시절 부모 다음으로 가까운 사회화 대상을 잃게 됨을 의미한다. 형제는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서로의 발달에 영향을 끼친다. 외동이 영·유아를 주대상으로 사회성 발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마나모로’ 신혜원 원장은 “형제 있는 아이는 하루 24시간 내내 사회적 기술을 훈련하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성장기에는 외동이의 사회성 떨어져



개중에는 형제와 날마다 투닥거린 기억밖에 없다고 불평을 터뜨릴 사람도 있겠다. 그렇지만 한 살 터울이든 열 살 터울이든 형제 간은 당연히 다투게 되어 있고, 또 다투는 것이 정상이라고 신원장은 설명한다. 이유는 하나.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쟁취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심리학자 중에는 다투지 않는 형제는 불행하다고 잘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형제가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형제가 경쟁자인 것만은 아니다. 형제는 가장 가까운 놀이 친구로서 서로의 인지·사회 발달을 촉진한다. 형제 있는 아이는 서로 자극을 받기 때문에 외동이보다 우수한 지적 발달을 보인다고 일부 학자는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79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사회성 발달 측면에서 형제 없는 아이가 불리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 나이가 들수록 그 차이가 줄어든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최소한 성장기 동안 외동이의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네 살 난 외동아들을 동네 놀이방에 보낸 김 아무개씨(35·서울 마포구)는 1주일 만에 놀이방을 그만두게 한 경험이 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다른 아이에게 뺏기고도 항변 한번 못한 채 선생님 꽁무니에만 숨으려는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져서였다. 이처럼 혼자 큰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데 서투르기가 쉽다. 최악의 경우에는 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해 외톨이·왕따로 전락하는 외동이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고 삼성생명 정신건강연구소 오승근 연구원은 말한다.





중산층 부모, 액세서리로 한 명만 낳아



물론 이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학계의 최근 연구 결과들은, 외동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곧 형제가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부모의 양육 태도가 외동이의 행동 특성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부모가 적절한 관심과 애정을 제공하면 외동이라도 바람직한 발달을 기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칠 때이다. 부모가 지나친 애정이나 과잉 기대를 쏟을 경우 버릇없거나 자기만 아는, 외동이의 부정적 특성이 나타나기 쉽다고 박경자 교수(연세대·아동학)는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교수는 어떤 사람이, 왜 외동이를 가지려 하는지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교육 수준이 높은 고소득층일수록 자녀를 많이 낳는 미국과 달리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를 적게 낳으려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늦둥이를 낳는 것이 부의 상징인 양 취급되는 풍조가 상류층 일각에서 확산되고 있기는 하다).



이는 중산층 이기주의의 산물일 수도 있다. 종족 보존보다는 내 생활을 즐기자는 라이프 스타일이 확산되면서 ‘아이가 없으니 허전하고 많이 두자니 부담스러운’ 부모들이 액세서리인 양 외동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중산층은 한편으로는 내 아이만은 다르게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계층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질수록 신분 탈락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는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이며, 훗날 유학 비용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둘째를 낳을 엄두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이 주부 이 아무개씨(35·서울 강남구)의 말이다.



그러나 외동이가 늘어나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함인희 교수는 지적한다.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외동이는 가족주의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대적 개인의 출현을 상징한다. 구미의 개인주의가 프라이버시 등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과 달리 한국의 개인주의는 가족으로 상징되는 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기실 외동이는 장남이기 때문에 희생해야 한다거나, 동생이기 때문에 양보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지 않는다.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외동이가 증가하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다. 우애 소설을 연구하는 조춘호 교수에 따르면, 문학 작품의 경우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화되는 17세기 이후 형제간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곧 장남·차남, 아들·딸이 번갈아가며 제사를 모시던 이전과 달리 장남이 제사를 독점하는 대가로 재산을 상속받는 제도가 확립되면서 형제간 반목과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혈연 자원 없어 불리하다?



외동이는 이런 왜곡된 가족 제도로부터 자유롭다. 대신 외동이는 혈연·지연·학연이 여전히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태생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감수해야 한다. 농경사회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형제란 곧 ‘내 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을 쓴 심리학자 양혜영씨(미시간 주립대학 박사)는 말한다. 다시 말해 형제는 ‘가깝되, 각자의 삶을 존중해야 할 타인’이라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혈연 자원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외동이 증가 현상은 이런 혈연 문화 퇴색 또한 예감케 한다. 피를 나눈 형제 대신 ‘유사 형제’, 곧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형제를 만들어 주려는 부모들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80쪽 딸린 기사 참조). 독신 가족, 자발적 무자녀 가족, 한부모 가족 등 최근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난 세기 스탠리 홀이라는 심리학자는 “외동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외동이가 오히려 경쟁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인류가 수천 년간 이어 온 2촌 관계가 무너지는 시대, 가족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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