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을 얻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임마뉴엘처럼 머리를 싸매는 사람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1990년만 해도 귀화자는 37명에 불과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일이 태극기 전수식을 했을 정도. 수십 년 동안 50명 밑자리에서 맴돌던 귀화자가 1998년 100명 선을 넘기더니 지난해에는 6백61명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 증가세는 더욱 가파르다. 10월 말까지 벌써 1천9백62명이 새로 국적을 얻어 올해는 2천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77쪽 표 참조). 물론 조선족 여성이 폭증세를 주도하고 태반이 한국 혈통이다. 하지만 아시아인을 비롯해 다양한 이유로 한국인이 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요사이 귀화 신청자가 한 달에 4백~5백 명에 이른다. 종전에는 신청 후 두 달이면 귀화 시험을 치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1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치르던 시험을 주 1회로 늘려 치르는데도 그렇다. 이들은 왜 한국인이 되기로 결심했을까. 또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느낄까.
배우자 따라·핏줄 찾아 귀화 신청
임마누엘 씨는 지난 8월 부인과 함께 귀화를 신청했다. 그가 귀화를 염두에 둔 때는 1998년.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부터 액세서리·원단 장사로 돈을 모았다. 지금은 식당 2개와 여행사를 운영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은행 대출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비자도 골칫거리였다. 그는 “직원 문제가 급했다. 주로 외국인 직원을 두는데, 내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비자 연장이 잘 안됐다. 내가 한국인이 되면 직원들 비자 연장이 잘 될 것이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벌써 한국 이름도 정해 놓았다. 김남수. 본관은 이태원으로 할 계획이다. 내년 3월이면 이태원 김씨 가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핏줄을 찾아 한국인이 되려는 교포도 많다. 지난 10월30일 김알렉씨(41)는 마포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카레이스키 집안에서 자란 김씨는 1993년 한국에 러시아어 강사로 왔다가 정착했다. 지금은 주로 러시아와 거래하는 무역회사 한소기술통상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고, 또 치안이나 앞으로의 비전을 따져보면 한국이 러시아보다 더 살기 편하기 때문에 귀화했다”라고 말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겪는 불편함도 없애고 싶었다. 매번 비자를 연장할 때마다 회사의 한국인 사장이 실사를 나온 출입국 담당자에게 애원하다시피 해야 했다. 은행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도 안된다. 이젠 다르다. 민방위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호적은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 알아보려 구청으로 향하는 김씨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인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오금도씨는 5년 전 한국 국적을 택했다. 아버지는 타이완인, 어머니는 한국인. 50% 한국인이었던 그는 귀화 후 비로소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오씨는 “지난 월드컵 때 딸과 함께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도 크게 작용했다. 줄곧 화교 학교에 다닌 그는 특례 입학으로 원광대학교에서 한의학을 전공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그도 이 땅에서 화교들이 겪는 불이익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오씨는 “소방서에서건 경찰에서건 누가 찾아오면 무조건 돈을 집어주는 게 버릇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화교 출신으로서 한국 국적을 얻은 사람은 화인(華人)이라고 불린다. 화교의 약 10% 정도가 귀화한 것으로 추산된다. 수십 년을 살면서도 외국 국적을 갖고 있는 탓에 겪어야 할 불이익을 감안하면 놀랍도록 적은 숫자이다. 오씨에 따르면, 화교 가운데 중국에서도 보수적이고, ‘충(忠)’의식이 강한 산둥 출신이 많다는 기질적인 요인도 있고, 한국 정부의 ‘화교 탄압’ 때문에 귀화한 사람을 배신자 취급 하는 분위기도 작용했다. 그는 비록 자신은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못박는다. “귀화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어야지, 동화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문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처음 도입된 영주권 제도는,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외국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80쪽 상자 기사 참조). 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각종 규제 정책이 풀린 것은 적극적인 발상 전환이라기보다는 IMF라는 위기 상황 덕이었다. 그 전까지 외국인은 주택 2백 평 이하, 점포 50평 이하만 소유할 수 있었고, 자신의 건물을 임대조차 할 수 없었다. 화교들은 한국이 타이완과 단교한 이후, 한국과 고국 어디서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피해 의식이 짙어졌다.
임마뉴엘이나 김알렉, 오금도 씨는 모두 일반 귀화자이다. 일반 귀화를 택할 경우 한국에 5년 이상 거주하고, 재산이나 신원 보증 절차를 거친 뒤 시험을 통과하면 한국인이 된다.
국제 결혼이 늘면서 배우자를 따라 국적을 얻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들에게는 간이 귀화 혜택이 주어진다. 결혼한 지 2년 뒤 귀화를 신청할 수 있고, 시험을 보기까지 보통 1년이 걸린다. 일반 귀화 요건인 5년에 비해서 짧기 때문에 간이 귀화로 불린다.
이름은 간이 귀화이지만, 외국인 여성에게는 국적 취득이 훨씬 복잡해졌다. 1997년 국적법이 개정되면서부터다. 이전에는 한국 남성과 결혼하면 즉시 한국 여성이 되었지만 이제는 외국인 여성도 외국인 남성처럼 일정한 요건을 갖추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국적을 얻을 수 있다. 좋게 보면 양성 평등이지만, 양쪽 모두 간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하향 평준화’라고 불릴 만하다(남성의 경우 요건 기간이 1년 단축되기는 했다).
5년 전 필리핀인 아내와 알콩달콩 연애 끝에 결혼한 전진우씨. 새 국적법이 발표된 후 혼인 신고를 한 탓에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
필기 시험을 치른 아내에게 면접 때 남편과 함께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를 본 면접관이 말했다. “당신 아내가 꼴찌입니다. 공부 좀 시키세요.” 평소 물건 흥정도 잘 하고, 경상도 사투리까지 그럴듯하게 하는 아내인지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한 문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 시험 날짜를 받고는 안되겠다 싶어 수소문 끝에 ‘시험 족보’를 구했다.
귀화 시험 합격하려 ‘족보’ 구하기도
‘네팔 출신 한국인 1호’라고 자부하는 라마 구릉 씨는 한국인 아내 진희숙씨와 결혼한 뒤 귀화를 결심했다. 짬짬이 검정 고시 수험생을 위한 학원에 다녔다. 직장인인 그로서는 시험 준비를 따로 할 형편이 못되었다. 두 번 낙방한 끝에 지난 2월 합격증을 받아 쥐었다.
다른 문화가 섞이다 보니 사는 모양새도 요지경이다. 필리핀인 아내와 딸을 두고 있는 전진우씨는 아이가 어느 나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이다. “급하면 세 가지 언어가 뒤섞인다. 한국어, 영어, 타갈로그어(필리핀 말).”
김알렉씨 가족은 집에서는 한국 음식과 러시아 음식을 반반씩 먹는다. 러시아인 아내 다치아나 씨(28)도 된장찌개와 김치를 좋아한다. 그녀는 아들 시묜이 잠에서 깨어나 울자 한국말로 “울지 마, 울지 마”라며 달랜다. 하지만 집 전화기 앞에는 러시아 국제 전화 카드가 여러 장 널려 있다. 아내가 향수병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아내는 귀화할 생각이 없고, 김씨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 시묜에게도 앞으로 1년에 두 달 정도는 러시아에 머무르며 양국 문화를 익히게 할 생각이다.
라마구룽 씨와 진희숙씨 집안의 요즘 관심사는 남편의 성이다. 주민등록은 일단 구릉라마로 받아 놓았다. 하지만 호적은 문제가 다르다. 세 살배기 아들의 이름은 진태을. 아빠가 외국인이었으니 엄마의 호적에 올리고 엄마 성을 따랐다. 진씨가 생각하는 좋은 방법은, 아빠가 아이 성을 따르는 것이다. 요즘 진희숙씨는 본은 네팔로, 성은 진으로 지으라고 조르고 있는 중이다.
국적을 얻으면 제도상의 차별은 걷힌다. 하지만 이들은 일상에서의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얼굴색이 다른 그들, 가난한 나라 출신인 그들을 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선교 활동을 펴고 있는 독일인 목사 박 용 씨는 한국의 유난스러운 피부색 차별을 이렇게 꼬집는다. “나도 차별받는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우대하는 것도 차별이다.” 필리핀인 아내를 둔 전진우씨는 친구들과의 가족 동반 모임에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네팔인 남편을 둔 진희숙씨도 한국 친구들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고 있다. 진희숙씨 어머니는 맏사위가 외국인, 그것도 선진국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남편이 ‘어머니를 우리가 모시자’고 제의한 뒤부터다. 장모는 맛난 음식을 하면 얼굴 검은 맏사위부터 챙긴다. 듬직한 맏사위 라마구룽 씨는 벌써부터 어떻게 한국인 대접을 해달라고 해야 할지 궁리 중이다. 그는 “월급을 더 달라고 해야 하나, 무턱대고 불법체류자 취급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수도 없고”라고 말했다.
귀화인 통계를 보면, 이른바 선진국 출신은 드물다.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것을 항상 나라 자랑 첫머리에 올리는 한국인들은 ‘까만 얼굴의 한국인’에게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