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3단계 협상안 마련했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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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현 당선자를 중재자로 활용하고 미·중·러의 안전 보장과 2000년에 체결한 ‘북·미 공동선언’으로 불가침조약을 대체한 뒤 국제 사회와 관계 정상
당면한 북한 핵 위기에 대한 북한측 협상안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시사저널>이 해외에 거주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을 통해 확인한 북한측 협상안은 최근 제3자 중재를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이 국제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북한측 협상안은 해외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북한측 외교 채널과 직접 접촉해 수집한 내용을 <시사저널>이 종합한 것이다.





이 북한측 협상안은 북·미 양측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요 쟁점에 대해 나름으로 양보안을 포함한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북·미 협상에서 가장 어려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맨 첫 단계, 즉 협상의 고리를 거는 단계에서 한국을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국제 사회에서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누구를 중재자로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한국이 협상의 첫 단추를 꿰는 주역을 담당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보조하는 식으로 ‘교통 정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국제 사회가 제시한 여러 가지 협상 방안을 단계적으로 적절하게 차용했다는 점에서 북측의 ‘포괄적인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측 협상안은 크게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1 단계는 북한과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 이전 단계, 즉 환경 조성 단계에 해당한다. 지난해 10월 이후 조성된 핵 위기를 해소하고 제네바 합의 체제로 원상 복귀하는 것이 1단계의 목표이다.



“한국이 중유 공급 재개 약속만 받아내라”



현재는 북·미 양국이 직접 만나 핵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핵 문제 등장 이래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개발을 포기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고, 북한은 북·미 양측이 동시에 조처를 취하자는 ‘동시 행동 요구’로 맞서왔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면 될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양측 모두 자존심과 국제적인 체면을 걸고 ‘사활을 건 듯이’ 대립하는 형국인 것이다. 사실 양측 모두 누가 좀 말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북측 협상안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한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담보를 해주면 북한이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담보하라는 것인가. 북한이 지난 12월1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계기로 핵동결 조처 해제에 들어가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지난해 11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2월분 중유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전력이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원자로를 가동해서라도 전력을 보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동결 조처 해제의 제1 단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문제는 간단하다. 중유 공급을 재개하면 다시 핵 동결 상황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는 겉보기에 간단해 보이는 이 문제조차 해결하기 힘드니 한국측이 나서서 중유 공급을 재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달라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북한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 후 미국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이 핵동결 해제 조처를 중단할 경우 미국이 중유 공급을 재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국 한·미 양국이 중유 공급 재개를 담보해주는 셈이 되는데, 이 경우 북한은 더 이상 핵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핵개발 유예 조처’를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에 약속대로 미국이 중유 공급을 재개하는 시점에 이 유예 조처를 동결 조처로 바꾸어 제네바 합의 체제로 원상 복귀한다.



이 협상안의 특징은 한마디로 북한이 먼저 행동에 들어갈 테니 한·미 양국이 명분을 달라는 것이다. 불가침조약 체결이라는 커다란 목표만을 앞세웠던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매우 구체적인 안을 내놓는 셈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국이 먼저 하기는 어려울 테니 한국이 중간에 서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미국측에도 일정한 배려를 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도 별로 나쁠 것이 없다. 그동안 미국은 ‘나쁜 행동에 대해서 보상하지 않겠다’고 해왔으나 중유 공급 재개는 새로운 보상이 아니다. 그동안 미국으로서도 한 발짝 물러설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핵 문제 당사국인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새로운 부담을 질 필요가 없는 요구를 해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조처를 통해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민의 반미 정서와 한국의 새 정부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쓸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부시, 북·미 공동선언 부활 거부할 수도



첫 번째 단계에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북·미 양국이 직접 마주앉을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즉 두 번째 단계인 북·미간 직접 협상을 통한 포괄 협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불가침조약 체결과 미국이 안보상 현안으로 제기해온 핵 미사일·재래식 무기 문제를 어떤 순서로 논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다.



특히 불가침조약 체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넘어갈 것인가가 쟁점 중의 쟁점이다. 지난해 10월 북한 핵 위기 발생 이후 북한은 한반도 핵 문제의 근원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 선제공격 위협과 대북 적대 정책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불가침조약 체결이다. 그러나 미국측은 핵 문제가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이를 포기하면 된다고 맞서왔다. 북한이 주장하는 불가침조약은 현안이 아닐 뿐 아니라 절차상으로도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절대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측의 새로운 협상안은 불가침조약 내용을 세분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포기와 핵 선제 공격 포기를 각각 다른 틀로 담보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우선 후자의 핵 선제 공격 포기, 즉 불가침 약속과 관련해 북한측은 그동안 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추진해온 미국·중국·러시아 3국의 안전보장 약속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핵 문제가 발생한 이후 푸틴 대통령이 중재역을 자임하면서 전면에 등장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22일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12월2일 장쩌민 중국 주석과 회담한 이후 12월24일 일종의 중재안을 제시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할 경우 미국·중국·러시아 3국이 정치 선언 등의 방법을 통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미국측은 아직 공식 언급은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이 안을 환영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핵 문제의 성격을 미·북 대립 구도에서 북한과 국제 사회의 문제로 전환하고자 시도하는 미국측의 의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측이 문제다. 북한은 현재의 핵 국면이 단순히 미국의 핵 선제 공격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근원적으로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그 문제까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과의 담판이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북한의 새로운 협상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서로 마주앉아 새로운 협상을 벌이려면 쑥스러울 테니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창고에서 꺼내 쓰자는 것이다. 지금은 까맣게 잊고 있지만 북·미 양국은 2000년 10월12일 앞으로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이 좋게 살자고 역사적인 합의를 한 바 있다.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인민군 차수가 군복을 입고 백악관을 찾아가 클린턴 대통령과 합의한 것이다.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항상 앞에 달고 다녔던 이 북·미 공동선언의 핵심은 바로 적대 관계 해소였다. 이 밖에도 △평화 보장 체계 수립 △경제 무역 전문가 상호 교환 △제네바 기본합의문 준수 △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테러 반대 △미군 유해 발굴 등 인도적 사업 지속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북 추진 등 그야말로 역사적인 내용들을 잔뜩 담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이 공동선언을 과거 정권의 일로 치부해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었다. 따라서 그것을 다시 꺼내 쓰자는 북한의 주장에 응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 정부가 이미 해놓은 것을 재생해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의회 비준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불가침조약에 비해서는 훨씬 간편한 안이다. 미국이 북측 주장을 수용할 경우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만나 ‘공동선언 부활 내지는 버전업’을 선포하면 된다는 것이다.
2단계의 가장 어려운 관문인 불가침조약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고 나면 양측의 기술적 현안이라 할 수 있는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문제는 시간을 가지고 협상해 가면 된다.






3단계의 첫 과제는 북·일 수교회담 재개



2단계를 넘어서면 곧바로 3단계로 넘어간다. 그동안 중단된 북·일 수교협상을 재개하고, 북한과 국제 사회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바로 3단계에서 할 일이다.
핵 문제 해법을 둘러싼 북한측 로드맵이라 할 수 있는 이 방안은 그동안 한국 정부를 포함해 국제 사회가 제기했던 다양한 협상 방안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방인 미국측 입장까지도 일정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러시아측 협상안 외에 최근 한국 정부는 지난 1월4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나름으로 중재안을 마련했다. 한국 정부는 이 중재안을 가지고 1월6~7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의 동의를 얻어, 이 달 중순 열리는 제9차 남북장관급회담 때 북측에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북한이 먼저 핵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은 문서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정부측 협상안은 미국측 입장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이다. 북한이 이 안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밖에 핵 문제 해법을 둘러싼 북한측 입장에 대해서는 지난 1월4일자 러시아의 이타르타스 통신이 개괄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이타르타스 통신은 이 보도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최소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회귀를 의미하는 `제로 버전(zero version)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만일 양측이 제네바 합의 수준으로 되돌아갈 경우 미국은 대북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을 재개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는 순서를 밟게 된다는 것이다. 이타르타스 통신은 또한 북한이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상호 불가침조약을 이끌어내는 작은 외교적 보너스를 따내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도는 북한측 협상안의 윤곽을 개괄적으로나마 가장 최근에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제일 어려운 첫 번째 단계를 어떻게 극복해 제네바 회담 체제로 복귀함을 뜻하는 ‘제로 버전’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2단계 협상에서 최대 장벽인 불가침조약 체결 문제를 ‘작은 외교적 보너스’라고 가볍게 보는 문제를 드러냈다. 또한 누가 중재를 주도할까 하는 점에서도 ‘중국과 러시아’가 중재의 주체가 되고 ‘다소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한국과 다른 가능성 있는 중재자’를 그 다음에 거론함으로써 자국 중심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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