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위해 몸 바치는’ 신건강족
  • 고제규·차형석 기자 ()
  • 승인 2003.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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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30∼40대 신건강족이 등장했다. 윗세대인 5060 건강족이 앉아서 몸을 챙기는 보신족이었다면,
퇴근 시간, 현대증권 김지환 팀장(42)은 책상 밑에서 종이 가방을 꺼내들고 지하 1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록 비트가 강한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가 흘러나왔다. 나이트클럽에라도 온 듯, 김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새 그는 넥타이를 풀고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리듬에 맞춰 팔 다리를 쭉쭉 폈고, 신나게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구부정했던 그의 어깨가 쫙 펴졌다.




현대 직원이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하는 서울 여의도 현대증권 휘트니스 센터, 20대 ‘젊은 피’를 위해 지난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애용자는 20대가 아니라 30대와 40대였다. 홍보팀 장철호 과장은 “우리도 놀랐다. 특히 40대 과장급 사원들 관심은 폭발적이었다”라고 말했다. 1월22일 오후 6시, 휘트니스 센터를 이용하는 10여명 가운데 20대는 단 한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3040 세대’였다.


외국계 회사 이사인 김재경씨(41)는 1주일에 두 번 10km씩 한강변을 달린다. 김이사는 달리기 외에도 골프를 친다. 그러나 그에게 골프는 스포츠가 아닌 비즈니스용이다. 운동마저 일의 연속인 셈이었다. 마흔 고개를 넘기면서 그는 생각이 달라졌다. ‘일은 일이고, 운동은 운동이다.’ 그래서 택한 마라톤은 그에게 건강을 위한 투자다. 김씨뿐 아니라 주말이면 한강변을 달리는 마라토너들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30대와 40대 사이에 건강 주가 ‘블루칩’으로 뜨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대박을 터뜨린 건강 주는 한풀 꺾일 만한데, 해가 갈수록 상승세다. 30대와 40대가 주축이 된 신건강족이 ‘쌍끌이 상승’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건강족은 있었다. 50대와 60대가 주축이 된 기왕의 건강족은 음식을 가리고 보충하는 보신족이었다. 보약이나 보신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이 건강 비결이었다. 동남아 보신 관광을 유행시킬 만큼 보신족 바람은 한동안 거셌다.


하지만 최근 건강족에도 세대 교체가 일고 있다. 보신족이 주춤하는 사이 신건강족이 주류로 떠올랐다. 신건강족은 먹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인다. 이들은 주로 3040 세대, 한마디로 행동하는 건강족이다. 이들은 20대 건강족과도 구별된다. 20대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덜하다. 20대에게 스포츠는 두 가지, 즉 재미있는 스포츠와 재미없는 스포츠로 나뉜다.





20대에게 재미없는 스포츠는 물건을 운반한다는 어원처럼 중노동일 뿐이다. 그래서 20대는 스포츠라기보다 ‘엔포츠’를 즐긴다. 재미를 뜻하는 엔조이와 스포츠가 결합된 엔포츠는 인터넷 세대인 N세대 의미도 담겨 있다. 디지털 세대답게 20대는 운동과 관련한 인터넷 동호회가 활발하다. 하지만 3040 신건강족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재미가 없더라도 시간과 돈뿐 아니라, 중노동과 같은 고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서울백병원 의사 고재환씨(38)는 전형적인 신건강족이다. 그는 매일 명동의 한 휘트니스센터를 찾아 땀을 흘린다. 한때 117kg이나 나갈 만큼 비만이었던 그는 살을 빼기 위해 먹는 것을 줄였다. 하지만 작심삼일이었다. 수십 번 넘게 시행착오를 겪었다. 늘어나는 몸무게에 자신감마저 잃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먹는 것만 신경 쓰는 1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기로 작정했다. ‘시간이 없다’ ‘나이 들어 무슨 운동이냐’라는 핑계를 접었다.


그러나 고씨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결심이 무색할 만큼 운동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가 근무하는 병원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명동 거리였다. 고심 끝에 명동 한복판에 있는, 외벽이 모두 유리여서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휘트니스 센터를 찾았다. 혼자였다면 힘들었겠지만, 이용자 가운데는 의외로 3040 세대가 많았다. 지금 그의 몸무게는 76kg. 30kg가 빠지면서 그는 휘트니스 센터에서 스타가 되었다. 고씨는 “운동이 생활이고, 생활이 운동이다”라고 말한다. 하루라도 뛰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한다.


신건강족에게 운동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다. 고씨 말마따나 생활의 일부다. 운동 공간도 일터나 집 등 생활 근거지와 밀착되어 있다. 보신족들이 교외로 나가 먹고 마시는 전원형이라면, 3040 신건강족은 일터 가까운 데서 몸을 움직이는 도시형이다. 굳이 주말을 이용해 교외로 나가기보다 점심이나 퇴근 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다.


이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박 아무개씨(41)는 매주 화요일 젊음의 거리인 홍익대 앞으로 향한다. 4개월째 그는 영화 <쉘 위 댄스>의 주인공처럼 살사 댄스에 흠뻑 빠져 있다. 살사 댄스는 그에게 둘도 없는 운동이다. 강사 조영진씨는 “중급반에서 배우는 남성 가운데 90%가 30∼40대 직장인이다”라고 말했다.
건강 바람이 불면서 직장 문화도 바뀌고 있다. 급격하게 ‘퇴근후 술 한잔’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증권 휘트니스 센터 동호회 김광모씨(34)는 “요즘에도 할 일 없다고 술 한잔 하자는 간 큰 사원이 있느냐?”라고 되묻는다. 상사라 해도 술 한잔 하자는 말은 ‘왕따’를 자초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대신 운동하자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아줌마 부대’도 신건강족 대열 합류


회사들도 건강 열풍을 부채질한다. 벤처 기업에서 두드러진 현상인데, 운동비를 보조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운동 동호회 창립을 후원한다. 온라인 여행사 투어 익스프레스 전용권 차장(35)은 회사 덕에 신건강족에 합류했다. 사내 인라인스케이팅 동호회원인 그는 장비를 갖출 때 회사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그는 매주 수요일 밤이면 올림픽공원에서 인라인스케이팅 동호회 모임을 가진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가 밖에 나오면 일단 좋다. 동료들과 인라인스케이팅을 하다 보면 동료애도 덤으로 생긴다”라고 전씨는 말했다.


신건강족 대열에는 직장인뿐 아니라, 이른바 아줌마 부대도 합류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서울 이촌동에 사는 이양희씨(46)는 콩나물값 몇백원을 깎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아줌마. 하지만 그녀는 벌써 1년째 매월 10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자신을 위해 쓰고 있다. 요가를 1년째 배우고 있는 그녀는 “결혼과 함께 잠수했던 내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요즘 남편을 설득해 요가를 함께 배우고 있다.
각 구청이 운영하는 체육 강좌는 입시 경쟁보다 더 치열하다. 수강료가 싸서 아줌마 건강족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경찰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고복희씨(44)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구청 체육관을 찾고 있다. 고씨 역시 남편과 함께 운동을 한다.


신건강족은 건강 전도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몸에 좋은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무는 보신족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신건강족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운동을 권하기 바쁘다. ‘운동 권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 수성구에 사는 이태재씨(48)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건강 전도사다. 그러나 이씨의 어머니 추태순씨(82)는 마라톤 풀 코스는 말할 것도 없고, 100km를 뛰는 아들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어머니 추씨는 “밥 먹고 할 일 없어 뜀박질이냐”며 못마땅해 한다. 보다 못한 추씨는 며느리를 불러 아들의 달리기를 그만두게 하고 보약을 먹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이씨는 형과 동생 5형제를 모두 마라톤 마니아로 동참시켜 ‘불효’를 저질렀다. 설에 차례가 끝나면 온 가족이 마라톤을 하는 진풍경에 어머니 추씨는 혀를 찬다.





“운동 열풍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어머니의 성화에도 이씨가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데는 건강도 건강이지만, 40대 위기감도 한몫 하고 있다.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처진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지난해 말 27년 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포츠 숍을 연 이씨는 “운동을 하다 보니 자신감과 도전 정신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대기업 이사급인 김 아무개씨(48)는 명문 ㄱ대를 졸업하고 앞만 보고 내달린 ‘박종환식 스타일’이 몸에 밴 세대다. 자나깨나 일만 생각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을 사치로 여긴 돌쇠형이었다. 죽어라 일만 한 그가, 지금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지난해부터 회사가 히딩크식 경영 수업을 받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히딩크처럼 일 할 때는 하고 쉴 때는 쉬라는 것이다.


김이사에게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주5일 근무제는 타율 학습에 익숙한 수험생이 자율 학습을 하는 것만큼 어색하다. 토요일에 무엇을 할지 몰라 넋을 놓고 있던 그가 시작한 것이 운동이었다. 그는 “히딩크에게서 배운 점이 딱 하나 있다. 체력이다. 건강마저 잃으면 완전히 처진다는 압박감이 크다”라고 말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전방위로 조여오는 압박감이,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게 한 원동력이었다. “30대~40대 사이에 부는 건강 바람은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 40대를 주로 상담하는 한스 컨설팅 한근태 대표의 말이다. 40대는 외환 위기 이후 평생 직장이 보장되지 않는 첫 세대이자, 명예 퇴직을 준비해야 할 세대이며,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세대다. 한 준 교수(연세대·사회학)는 40대를 ‘위기의 세대’라고 정의한다. 한교수는 40대 건강 열풍에 대해 일벌레였던 세대가 변화를 자각하면서 자기 삶에 눈을 뜨자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위기의 세대인 40대나 위기 진입을 앞둔 30대에게 건강이야말로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한 유일한 자산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3040 신건강족, 그 열풍의 이면에는 변화와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위기 의식도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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