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나를 용서하게”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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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파 전 두목·부두목 김태촌·손하성 씨, ‘우정과 배신 그리고 14년 만의 화해’
35℃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11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 산자락에 있는 청송 제1교도소 면회실. 푸른 수의를 입은 초로의 수감자가 말끔히 면도를 하고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으로 창살 저편에 나타났다. 폭력조직 서방파 두목 김태촌씨(57)였다.

15년째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김씨를 찾아간 면회객은 김씨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 서방파 부두목으로 세간에 알려진 손하성씨(56). 이 날 14년 만에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의리·밀고·배신·보복 등으로 점철된 조직 폭력 세계의 어두운 체험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14년 동안 만날 수 없었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일’이 있었다. 1989년 1월 김태촌씨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폐암 수술을 받은 뒤 기도원에 들어가 왕성한 활동을 벌이자 손하성씨가 김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정리해 ‘위장된 폭력 조직 재건활동’이라며 청와대·법무부·검찰 등에 진정서를 냈던 것. 다급해진 김씨는 파문을 막기 위해 친구 손씨를 회유해, 멀쩡한 손씨로 하여금 1주일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했다. 그러나 김씨는 1990년 검찰에 체포되어 사형 구형을 받았고, 1심에서 무기징역형,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자는 두 사람의 아주 특별한 면회를 지켜보면서 둘 사이의 대화를 직접 들었다. 창살 저편 김씨 뒤쪽에서는 교도관이 이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었다.

손하성:건강은 좋은가 보네, 살이 좀 쪘구나.

김태촌:나는 다 늙었는데 자네는 혼자 살아서 그런지 하나도 안 늙어 보이네.

손:면회를 진즉 왔어야 했는데 내가 잘 풀릴 때라면 몰라도 어려운 지경에서 자네를 면회하면 남들이 ‘태촌이 덕 볼라고 쫓아다닌다’고 할까 봐 못왔네.

김:내가 자네에게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하네. 얼마 전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보냈는데 중간에서 누가 가로챈 모양이야. 자네가 내 진심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네.

손:내가 그때(1989년) 진정서를 낸 것은 생각이 짧았네. 용서하소. 자네가 나를 용서해 준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네.

김:주변에서는 그때 자네가 진정서를 내고 구상열씨(당시 김태촌씨의 차를 몰던 목사)가 비망록을 검찰에 제출해서 내가 사형 구형을 거쳐,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전낙원씨가 워커힐 최종현 회장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얘기하고, 엄삼탁이 개입해 내가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네. 일부 후배들은 손하성이를 보복해야 한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도와줘야 한다고 말려왔네.

손:자네가 나를 용서해주니 참으로 고맙네. 우리 어머니께도 전했더니 춤을 추실 만큼 좋아하셨네.

김:자네가 나와 친구 사이인데 내 차 운전이나 하면서 서방파 부두목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진정서를 낸 후에 일이 잘 안 풀리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손:그런 말 하지 말게. 우리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네는 출옥이라는 희망이라도 갖고 살아가지만, 나는 자네에 대한 죄책감에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용서해줘서 여한이 없네.

김:이 나이 들어서 보니 그렇게 좋아 보이던 조직이고 보스 자리고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 자네가 그 옛날 나에게 신학교에나 들어가자고 했는데 그 뜻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는지 절실하게 느끼고 있네. 이제 내가 자네를 돕고 싶네.

손:내가 감옥에 있는 자네를 도와야 하지 그게 무슨 말인가.

김:우리 이제 남은 노후를 떳떳하게 보내세.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이 14년 만에 배신과 복수의 감정을 딛고 우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다 알리고 싶네.
면회가 끝난 후 손하성씨는 동행한 기자에게 “차라리 그때 내가 친구를 밀고하지 않고 공범으로 들어가 징역을 같이 살았더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이다”라며 그간 말 못할 인간적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조직 폭력 세계에서 의리의 사이로 통하던 김태촌씨와 손하성씨가 1989년 갈등을 빚고 배반의 길을 걸어간 과정은 조폭 세계에서나 검찰 강력부 등 수사기관에서 전설적인 사연으로 통한다.

두 사람은 원래 광주 ㄷ중학교 동기 동창이다. 1970년대 말 국내 최대 폭력 조직 서방파를 조직한 김태촌씨는 친구 손하성씨에게 자신의 승용차 운전을 맡겼다. 손씨는 “태촌이가 내 친구지만 그가 잘되는 일이 내가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충심으로 부하를 자처하며 집사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손씨는 보스 김태촌씨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서방파 부두목으로 불렸다.

김태촌씨는 최근 <시사저널>에 보내온 ‘조폭 보스의 못다 한 이야기’에서 ‘고향 친구인 손하성은 운전 솜씨가 뛰어나 내 승용차를 운전하며 함께 생활했다. 내가 1986년 초 석방된 이후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들여다본 친구이다. 실형 전과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조직 폭력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온순하고 영리한 친구여서 비서 겸으로 함께 생활했다’고 적었다.

손씨는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습격 사건’(1986년) ‘범서방파 조직 신우회 결성’(1989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며느리 나 아무개씨 협박 사건’(1990)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태촌씨 관련 사건에 공범으로 가담했거나 옆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다.

이처럼 조직 폭력 세계의 의리로 뭉친 이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1989년 1월, 김태촌씨가 폐암 수술을 위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직후였다. 당시 김씨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암수술을 받은 뒤 손하성씨와 함께 기도원에 들어가 생활했다.
김씨는 이 무렵 감옥에 있을 때 편지로 인연을 맺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도움으로 기도원 생활을 하는 한편, 사회봉사단체 신우회를 결성했다. 김씨가 결성을 주도한 신우회는 박종석씨가 회장, 오기준씨가 부회장을 맡는 등 핵심 멤버 16명이 과거 서방파와 그 윗 계보인 번개파 출신들로 채워졌다. 손하성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당시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약점을 가리기 위해 김태촌씨가 위장 사회봉사 조직으로 신우회를 결성했을 뿐 실제로는 서방파를 재건하기 위한 전 단계로 파악하고 밀착 감시에 들어갔다.

바로 이 무렵, 손하성씨는 친구 김태촌씨의 활동을 밀고하는 진정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 대해 손씨는 “그동안 충심으로 친구를 도왔고 앞으로 둘이 협력해 모든 사업을 벌이자고 약속했는데 각종 이권 사업에서 나를 소외시켜 배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당시 손씨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김태촌씨에게 검찰의 감시가 심하니 진정으로 신앙에 전념하고 각종 이권 사업은 자기에게 맡겨서 처리하라고 권했지만 김씨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손씨를 소외시켰다고 말했다. 손씨는 자기가 작성한 진정서를 약 20일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망설이다 그 해 9월 청와대와 검찰 등 각계에 제출했다.

한국호국청년연합회 신규섭 명의로 된 진정서가 청와대 사정비서실·법무부장관·검찰총장 앞으로 보내지자 신우회는 발칵 뒤집혔다. 옛 서방파 후배들이 배신자 손하성을 보복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김씨는 이들을 말린 뒤 손하성씨에게 스스로 진정을 취하하라고 사정조로 요구했다. 손씨는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재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모두 허위 사실이라며 취하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다시 보냈다. 이로 인해 1990년 2월 초순 서울지검에서 손하성의 진정 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조직 폭력 세계에 퍼진 소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김씨는 친구 손씨에게 “네가 정신이 잘못되어 암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친구를 밀고한 것이라고 건달 세계에 알릴 테니 몇 달만 정신병원에 입원하라”고 압박했다. 결국 김씨의 회유에 못이겨 손씨는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 1주일간 입원했다.

그러나 김씨는 이미 권력 핵심의 내사 안테나에 포착되고 있었다. 폐암 수술 이후 그의 활발한 활동이 여성지와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나오면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씨는 권력 핵심 인사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을 자초했다. 골프장 건설 및 워커힐호텔 카지노 사업을 둘러싸고 전낙원씨와 갈등을 빚은 것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이던 최종현 선경 회장 집안에 대한 도전으로 비쳤다. 또 1976년 신민당 각목전당대회에 김태촌씨가 개입한 무용담이 보도되면서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

한편, 당시 김씨의 운전사로 있던 구상열 목사가 김태촌씨의 일거수 일투족과 정계·관계·법조계·군부 등에 적잖은 비호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비망록을 작성해 검찰에 제보했다. 검찰은 또 손하성씨를 불러 진정서를 취하한 배경과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과정에서 김태촌씨가 개입했다는 점을 밝혀내 수사 증거로 삼았다. 김씨는 정·관계 인사들을 비롯해 수많은 비호 세력을 구축했지만 정작 심복의 배반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1990년 5월 형집행정지 취소로 다시 체포된 김태촌씨는 출소 이후의 활동이 추가 기소되어 검찰 구형에서 사형,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검찰과 1심 재판부는 극형을 택한 중요한 증거로 손하성씨와 구상열씨의 진정서 및 비망록을 인용했다.

손씨는 이후 친구를 밀고했다는 주변의 손가락질 속에 숨어 지내듯 살아왔다. 한때 인테리어 사업을 하기도 하고 나이트클럽을 인수해 운영했으나 과거 아는 모든 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등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번번이 부도를 맞았다. 1999년부터는 미국과 중국 등지를 전전했다.

오는 10월3일은 김태촌씨가 기나긴 형기를 마치는 날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에 바로 복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 사건에 연루되어 보호감호 7년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최근 인천지방법원에 보호감호 판정을 다시 심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뉴송도호텔 사건에 현직 검찰 간부가 개입했는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검찰이 진실(‘청부 살해 모의 및 지시’)을 감추고 김씨가 혼자 사건을 기획한 것으로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김태촌씨는 18년 만에 진실을 말하겠다며 이 사건 관련 회고록과 증거, 증인 목록 등을 <시사저널>에 보내왔다. <시사저널>은 보호감호 재심 재판이 시작된 이후 서방파 보스 출신 김태촌씨가 고백하는 ‘못다 한 이야기’를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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