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의 ‘못다 한 이야기’ ③/‘밤의 대통령’ 되다
  • 정리·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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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씨는 지난호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밝히며 조직 폭력 세계에 발을 딛게 된 배경과 1980년대 한국 조폭 판도를 가른 이른바 3대 패밀리 전쟁 전야를 회고했다. 이번에는 조폭 전쟁의 종말과 김태촌의 천하통일을 상징하는 1986년 한강 둔치 ‘건달 체육대회’의 숨은 사연과 당시 정·관계 실력자들과의 유착 실태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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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봄 오비파 두목 이동재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친구 이○권, 김○광과 함께 밤새워 작전을 세웠다. 이동재를 오종철 선배보다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매장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파레스호텔 특실 VIP룸을 미리 얻어 두고 이동재를 납치해 그곳에서 보복하기로 했다. 납치 후 이동재가 조직 세계를 떠나겠다고 혈서로 각서만 쓴다면 오비파를 해체한 후 고향으로 내려보낸다는 시나리오였다.

먼저 10년 전 오종철 선배를 난자했던 특공대 후배들을 불렀다. 그들도 세월이 흘러 서른 초반의 가장이 되어 있었지만, 검증된 후배들이기에 그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함께 재판받았던 후배들과 당시 내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식구들을 포함해 30여 명을 동원했다. 맘보파 두목 오○홍이 특공대 10여 명과 함께 왔다. 신촌 힐싸이드 나이트클럽에서 총지배인으로 있던 이양○도 자기 후배 10여 명을 데리고 왔다.

본격적인 전쟁 선포에 앞서 나는 비겁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동재에게 전쟁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로 했다. 1975년 무교동 엠파이어 주차장 도로에서 오종철 선배를 난자한 사건은 급습이었다는 이유로 뒷말이 좀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정○원 선배를 만나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이동재를 비호하고 추종하는 선배들을 따로따로 다 불러서 만났다. 나는 정선배에게 ‘이동재와 오비파를 섬멸하겠으니 앞으로는 그쪽에 의지하지 마시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정선배는 시종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제발 오비파와의 전쟁은 삼가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엎지른 물이므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늘 오후 오비파와 이동재는 섬멸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선전포고는 마친 셈이었다.약속된 서초동 건물 앞으로 서방파 식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김○광은 후배 정○식·김○수 등 10여 명의 핵심 멤버를 데리고 왔다.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나는 이동재만큼은 오종철 선배 사건 때처럼 무조건 난자해 불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신사적으로 납치해 오비파를 스스로 해체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지○천 선배는 1976년 나와 한 집에서 생활했는데 내가 감옥에서 5년 6개월을 살고 나와 보니 이동재와 동업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동재를 납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지선배에게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급한 일이 있으니 오후 3시께 삼정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유인해 놓았다. 그런 다음 곧바로 특공대 50여 명을 이끌고 이동재가 있는 사무실로 출발했다. 자가용 10여 대의 트렁크에 낫·도끼·회칼·쇠파이프·야구방망이를 나누어 싣고 이동재의 사무실이 있는 서초동 건물 앞에 도착했다.

먼저 이동재의 얼굴을 잘 아는 후배 10명을 시켜 이동재와 오비파 조직원들이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동재 사무실은 건물 2층이었다. 나는 각 조장 겸 책임자들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맘보 오○홍에게는 자기 후배 10여 명과 함께 계단 입구와 도로변에 대기하다가 만일 형사기동대가 출동하면 신속히 사무실로 올라와 알리라고 지시했다.

2층에서 이동재가 뛰어내려 도주할 경우에 대비해 사무실 뒤 도로에 10여 명을 배치했다. 납치 후 신속히 퇴각하기 위해 자가용 10대의 문을 열어놓은 채 1대당 1명씩 남아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김○광, 이○권은 특공대와 10년 전 오종철 선배를 난자한 후배들을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손에 칼과 낫, 도끼를 든 나머지 20명이 뒤따랐다. 오비파 조직원들의 얼굴을 모두 아는 이양○를 내 옆에 세웠다. 이동재 사무실에 들어서니 남녀 종업원들이 책상 앞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동재 사장을 찾자 종업원이 화장실을 가리켰다. 화장실 문을 확 열어제쳤다. 그러자 입구에 오비파 조직원들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봉쇄하고 있었다. 역시 이양○ 다웠다. 그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 있는 오비파 조직원에게 회칼을 들이대며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없애 버리겠다”라며 칼을 휘저었다. 이○권이 회칼을 휘젓는 가운데 내가 앞장서 나서자 오비파 조직원들은 허물어졌다. 야구방망이를 내려놓고 출구를 열어주었다.

후배 영웅심 탓에 ‘피의 복수’ 실패

화장실과 이어져 있는 사무실 안에 이동재가 지○천 선배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분명히 지○천 선배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삼정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이동재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낫과 도끼와 칼을 꺼내들고 이동재 곁으로 다가가는데 밖에서 “와! 다 죽여!”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칫했다. 요란한 구둣발 소리도 들렸다. 이동재는 천운을 타고난 사나이였다. 불과 몇 초 만에 납치를 면한 것이다.

나는 형사기동대가 출동해 대기하던 오○홍이 혈투를 벌이다가 우리에게 연락하는 신호로 알았다. 어느 한 명이라도 조직원이 검거되면 안되기에 어쩔 수 없이 이동재를 뒤로 하고 모두 다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함을 지르며 복도 계단을 올라오는 무리는 형사들이 아니고 맘보 오○홍과 후배들이었다. 20여 명이 눈에 핏발이 선채 손에 칼과 도끼와 낫을 들고서 “이동재 새끼 죽여라”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작전은 완전히 실패였다.

영웅심에 사로잡힌 오○홍과 후배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홍이 착각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필생의 라이벌인 이양○에게 이동재를 납치하게 해 영웅이 되게 하고, 자신은 건물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한 것을 억울해 한 것이다. 그가 직접 이동재를 납치하거나 이동재를 난자하려고 한 것이다.

자칫 오○홍의 영웅심에 이동재와 오비파 조직원들이 무작정 난자당할 것 같았다. 나는 오○홍과 후배들에게 즉시 원위치로 돌아가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뒤집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육탄으로 계단 밑으로 밀고 내려갔다. 내가 워낙 강하게 나가자 오○홍과 후배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 오○홍은 컥컥 울며 내게 항의했다.

그 때였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형사기동대가 출동한 것이다. 건물 직원이 조직간 패싸움이 일어났다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이제 이동재 납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형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우리를 검거할 수가 없었다. 조직원 수십 명이 무기를 휘두르자 형사들도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들은 시동을 걸어둔 승용차에 번개같이 올라타고 자리를 떴다. 이동재의 간담은 서늘했겠지만 이게 무슨 꼴인가. 이동재를 납치해 혈서를 받으려고 얻어둔 파레스호텔 특실로 돌아와 우리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제 이동재도 전면전에 대비할 것이다.
오종철 선배는 불구가 되었지만 지인들 결혼식에는 참석했다. 조양은을 15년 징역 살도록 했고 하극상을 저지른 김○철의 결혼식에도 참석해 나와 차 한 잔 나누었다. 그는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 당시 총지휘자였다는 이유로 나에게 보복을 당해 불구가 되고 말았다. 나는 늘 그에게 죄송스러웠다. 오선배는 오비파 사무실 습격 사건과 이동재 납치 미수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보스의 비극적 종말은 나 한사람으로 족하니 더 이상 보스가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동재도 지금쯤 사무실까지 습격하러 온 김태촌의 대담성에 기가 죽어 있고, 그 날 형사기동대만 출동하지 않았어도 큰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도박장 개장 문제로 내 친구 이○권을 난자했는가 하면, 내가 석방되어 사회에 있는데도 조직원을 보내 내 친구 김○광의 구역인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 멤버를 폭행하도록 조직원 부하들을 보냈기에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선배는 이동재와 만나 대화부터 먼저 나누라고 간청했다. 대화가 안되면 그때 가서 전쟁을 치르더라도 일단 자기가 주선하겠으니 선배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이동재와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오선배가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라며 간청하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동재와 독대했다. 얼굴이 긴장되어 굳어 있던 이동재가 “오따 정○원 선배의 문갑 문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직의 보스가 부하 조직원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설혹 오따 선배께서 부하 조직원들을 움직였다고 할지라도 부하 조직원들이 보스에게 사후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받아쳤다.

나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이동재와 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전쟁을 하자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동재는 이미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오종철 선배의 부탁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서방파 친구들에게 행패를 부린 부하 조직원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동재는 그릇이 큰 보스였다. 나의 뜻을 흔쾌히 수용했다. 이동재가 말했다. 나의 뜻대로 이○권을 난자한 부하 조직원 특공대들과 김○광의 업소에서 권○일 멤버를 폭행한 부하 조직원 등 오비파 핵심 식구를 다 보내주겠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보스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차라리 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후배들의 자존심과 사기 진작을 위해 전쟁을 벌였을 텐데 이동재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다음날 나는 친구 김○광, 이○권과 함께 항복을 받기 위해 이동재를 만났다. 우리 세 사람은 야구방망이를 준비했다. 자기 발로 걸어온 오비파 조직 식구들을, 그것도 보스 이동재의 지시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그들을 난자한다는 것은 보스로서 할 일이 아니었기에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간 것이다.

이동재는 약속을 정확히 지켰다. 신병을 넘기기로 약속한 후배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알아서 처리하라며 인계 인수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리고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만 골라 쳤다. 그들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의젓하게 맞았다. 나는 그들이 멋있어서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칭찬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이○권과 김○광이 갖고 있던 감정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치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비파 행동대원들을 폭행한 쪽은 나와 서방파였지만 승리는 오비파의 것이었다. 후배들을 적장에게 희생양으로 보낸 이동재의 승리였고, 의연하게 야구방망이를 맞고 웃음보따리를 터뜨리는 오비파 행동대원들의 승리였다.

오비파와 서방파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동재와 나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오종철 선배를 함께 만나 큰 전쟁을 막게 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오선배의 뜻에 따라 앞으로는 한 식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이같은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로 했다. 오선배와 이동재 그리고 내가 축구시합을 열어 조직 간의 우애를 다지고 사방파·오비파·양은이파 삼대 패밀리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기로 합의했다.

부장검사가 ‘건달 축구대회’ 주관

그때 조양은은 15년 징역을 살고 있었기에 사실상 양은이파는 와해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1년 후배인 백○두가 명맥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백○두는 대구 수성호텔 살인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와서 나름으로 후배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지만 조양은이 있을 때보다는 세력이 약했다. 이동재와 나는 백○두를 만났다. 양은이파 식구 조직들을 데리고 축구시합에 참석하라고 일렀다. 양은이파 실세인 그도 환영했다.

검찰과 언론을 의식해야 했다. 김태촌이 천하통일한 축구시합이라고 알려지면 안되었다. 박남룡 서울고검 부장검사에게 부탁했다. 현직 부장검사이면서도 전국새마을 조기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부장검사가 서방파·오비파·양은이파 등 폭력 전과자들을 새마을 정신으로 갱생시키려는 의미에서 축구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박남룡 부장검사는 대찬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에게 의뢰해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과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려던 판국이어서 내가 축구시합 협조를 부탁하자 찬성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 사건의 숨은 진상은 다음에 회고하려고 한다.

박남룡 부장검사는 내게 새마을 조기축구협회 심판진을 소개했다. 그리고 대회 이름도 제1회 새마을축구대회로 명명했다. 대한민국 건달들이 해마다 한 번씩 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제1회라고 못박았다. 그래야 건달 조직 상호 간에 다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 서로 돕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와 이동재는 호남 선배들을 모두 초청했다. 제일 큰형님인 이 ○ 선배부터 시작해 호남 선배 50여 명을 초청해 선수 명단에 등록시켰다. 자유당 시절 정치 건달 선배님도 두루 모셔 선수로 등록시켰다. 동대문사단 이정재의 핵심 부하였던 유지광, 역시 동대문사단의 엘리트인 서울상대 출신 낙화유수 김태련, 이정재의 부하인 오따 정종원, 명동파 이화룡의 핵심인 신상사(신상현), 시라소니(이성순)의 직계인 유명화, 광주의 전설적인 주먹 이 용·전희장·송태준 선배 등을 초빙했다.

축구시합에 무게를 싣기 위해 여야 정치인과 국회의원 들을 초청했으며 밴드를 동원했고, 사회는 유명한 코미디언에게 맡겼다. 때는 1986년 6월 중순, 초여름 날이었다. 한양대학교 옆 한강 둔치에 최고급 승용차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검은 정장 차림을 한 헤비급 청년들이 도착한 승용차들을 주차장 쪽으로 댄 후 일일이 본부석으로 안내했다. 서방파·오비파·양은이파 조직원들이 선발되어 서로 한 몸이 되어 안내한 것이다.

국회의원, 사회 저명 인사, 사업가, 5공 실세, 전두환 대통령 친척, 공무원, 검사 등 거물급 인사들이 본부석에 앉았다. 어림잡아 3백여 명의 저명 인사가 북적였다. 모두들 금일봉을 냈고, 방명록에 본인 이름을 기재했다. 이윽고 박남룡 부장검사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으며, 김상현 의원이 축사를 했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철승 의원은 중앙당 국장급 간부를 시켜 금일봉을 보내왔다.

이 날 금일봉 접수자 명단과 방명록에 기재된 저명 인사들로 인해 나는 몇 달 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사흘 동안 전기 고문과 물 고문을 당했다. 한달 뒤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 사건이 터지고 나에게 수배령이 내려졌을 때 그 방명록을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 날 모은 돈이 김대중씨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불라는 것과, 5·3 인천 사태 주동자인 재야 인사 장영달씨의 은신처를 대라며 혹독하게 고문했다. 나는 당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가한 분들의 이름을 함구했다. 당시 수배자이던 장영달씨도 축구시합을 구경하러 왔는데, 내가 숨겨주고 있었기에 바람 좀 쐬라고 한 것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축구시합은 나이 별로 다섯 팀을 구성해 치렀다. 20대, 30대, 40대, 50대, 그리고 60세 이상 대선배팀. 다섯 팀이 제1회 새마을(건달) 축구대회 우승 트로피와 우승기를 놓고 시합을 벌였다. 서방파·오비파·양은이파도 저마다 나이 별로 섞여 한 팀이 되어 공을 찼다

나는 당시 36세였기에 30~39세 팀이 되어 이동재와 한 팀으로 뛰었다. 그러나 우리 팀은 40~49세 팀에 패했다. 나는 공을 차다가 발목이 접질려 환자가 되었다. 오랜만에 공을 차다 보니 숨도 차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두가 허덕이며 공을 쫓아다녔다. 오전부터 시작해 점심 시간을 거쳐 오후까지 축구 시합을 했다. 꾸준히 조기 축구를 해온 40대 팀은 실력이 대단했다. 40대 팀이 1등을 차지해 우승기와 트로피를 차지했다.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우수상은 정○모 선배가 받았다. 그는 진로 사장과 모 스포츠구단장을 지내고 얼마 전 김○일 의원의 게이트로 구설에 올랐던 분이다. 상장과 트로피는 여유 있게 준비했기에 오종철 선배에게는 공로상을, 자유당 정치 건달 선배에게도 상장을 수여했다. 시상은 박남룡 부장검사가 맡았다.

제 1회 새마을 축구대회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나와 이동재는 건달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는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소문만 듣고 박○장 선배가 이 대회를 개최한 것처럼 보도했지만 사실은 이동재와 내가 합작해 이루어 낸 작품이었다. 이 날 시합이 끝나고 우리들은 서로 힘껏 껴안았다. 선배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축구시합을 마치고 이 ○ 선배가 이 날 행사의 핵심 멤버들을 불러 술좌석을 마련해 신나게 노래 부르고 놀았다.

그러나 이런 보람도 잠시였다. 박남룡 부장검사가 나를 부른 것이다. 서울 고등검찰청 검사실에서 박부장검사를 만나면서 내 인생은 새로운 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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