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영웅 퇴출 시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9.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길산> <영웅시대> <불멸의 이순신>을 시청자가 외면하는 까닭
지난 여름, 방송 3사가 일제히 블록버스터 대하 드라마를 쏟아냈다. <장길산>(SBS) <영웅시대>(MBC) <불멸의 이순신>(KBS). 2백억, 1백50억, 3백50억 내외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작이다. 각각 혁명 영웅·경제 영웅·역사 영웅을 다룬 이들 드라마는 방송사가 저마다 자존심을 건 기획으로 방영 초기부터 관심을 모았다.

이들 영웅 드라마는 처음부터 다른 드라마와 출발선이 달랐다. 모두 방송사들로부터도 특별 대우를 받았다. 정연주 사장이 직접 캐스팅에까지 관여하면서 애착을 보인 <불멸의 이순신>을 위해 KBS는 전작인 <무인시대>를 연장 편성하면서까지 방영 시기를 아테네올림픽 이후로 늦추었다. 올림픽 기간에 MBC는 시청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웅시대>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경기를 중계하지 않아 비난을 사며 시비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사들의 블록버스터 대하 드라마 경쟁의 전반전은 싱겁게 끝났다. 방송사들의 각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두 시청률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영웅시대>와 <불멸의 이순신>은 15% 남짓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장길산>은 10%를 겨우 넘기고 있다. 무엇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외면하게 만들었을까?

세 드라마에서 공통으로 지적되는 것은 부족한 연출력이다. 시청자들의 빨라진 호흡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준> <대장금>의 경우 사극이지만 매회 작은 갈등을 해소하면서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빠른 전개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이제 더 이상 ‘대기만성’형을 참고 보아 주지 않는다.

관전 포인트를 제대로 형성해내지 못한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대하 사극은 직장 생활 혹은 사회 생활에서 겪는 권력 관계의 갈등에 비추어 보거나 현실 정치에 견주어 볼 여지가 있어야 시청자들이 주목한다. <용의 눈물> <여인천하> <대장금>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웅을 돋보이게 할 라이벌 캐릭터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도 단점으로 꼽힌다. 이들 드라마는 주인공이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진 나머지 상대 배역과 제대로 된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사극에서 악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시청자들이 인간사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악역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의 궁예(김영철) 견훤(서인석), <여인천하>의 경빈(도지원), <대장금>의 최상궁(견미리) 등 시청자들은 역사의 영웅보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반영웅을 더 좋아했다. 승부수 잘못 짚거나 너무 일찍 던져

승부수를 너무 일찍 던진 것도 패인으로 꼽힌다. 초반에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영웅시대>와 <불멸의 이순신>은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인 결론 부분을 먼저 방영했다. <영웅시대>는 시작 부분에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을 정면으로 다루었고, <불멸의 이순신>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다루었다. 그러나 밑천을 먼저 드러내자 김이 빠져 버렸다. 하이라이트 부분이 끝나자 시청률이 급전직하했다.

승부수를 잘못 짚은 것도 있었다. 세 드라마는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것보다 외형을 화려하게 하는 쪽에 치중했다. 액션 신에 공을 들이거나(<장길산>), 상하이 촬영을 통해 시대를 복원하거나(<영웅시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화면에 박진감을 더하는 데 주목했다(<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서사 전문가인 윤석진 박사(충남대 강사)는 “‘집중과 응시’의 매체인 영화와 달리 ‘선택과 흘려보기’의 매체인 드라마에서는 스펙터클한 화면이 그다지 효과가 없다. 눈요깃거리보다는 드라마의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성 시청자를 외면한 것도 패착으로 꼽힌다. 남성 중심적인 세 드라마는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있더라도 부수적이다. <불멸의 이순신>의 경우, 주요 출연진 52명 중에 여자는 부인 역의 최유정과 초희 역의 김태연을 비롯해 겨우 5명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적극적인 여성상을 등장시킨 <용의 눈물>이나 <여인천하>보다 처진 것이다. 여성 시청자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애정 관계마저도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으로 그려져 있다. <장길산>의 경우, 장길산을 중심으로 처와 그가 사모하는 기생 묘옥의 이야기를, <영웅시대> 역시 천태산을 중심으로 일부다처식 애정 갈등 구도를 그렸다.

드라마가 남성적이기는 하지만 완성도가 있었다면 시청자들에게 이처럼 외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웅 드라마의 가장 큰 안티 세력은 원작을 읽은 시청자들이다. 이들은 영웅 드라마가 원작의 깊이를 살리지 못하고 시청률 때문에 원작을 왜곡했다고 비난한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몰락과 맞물려

<장길산>은 장형일 PD의 전작 <야인시대>의 조폭 코드를 그대로 따랐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장길산은 조선시대판 김두한이다. 의적과 탐관오리의 대립은 조선 주먹과 일본 야쿠자의 대립과 다를 게 없다”라고 분석했다. <영웅시대> 역시 신호균 CP가 이전에 연출한 <왕초>를 닮았다. 모든 문제를 주먹으로 풀어가는 천태산은 <왕초>의 주인공과 다를 것이 없다.

방송 3사가 비슷한 시기에 영웅 드라마를 기획했던 이유는 시대가 영웅을 요구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시대는 영웅을 요구하고 있을까? 장길산의 정의, 천태산의 성공, 이순신의 충성은 근대 정신을 대표한다. 드라마 마니아인 한지혜씨는 “시청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를 누가 좋아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요즘 시청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문제라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칼의 노래>를 몇번씩 읽게 만든 힘은 인간 이순신의 고뇌에 깊이 천착한 작가의 사유였다. 현대인은 세상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본 드라마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드라마에 관심을 나타낸다”라고 설명했다.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는 영웅 드라마의 몰락은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쇠퇴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비용 저효율의 영웅 드라마는 광고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방송사를 압박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반면 사소한 가족 문제에 주목한 가족 드라마는 ‘효녀’ 노릇을 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