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은 왜 밀려났나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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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 장기화·재정 적자 확대로 신뢰 잃어
부시 1기 정권도 따지고 보면 제임스 베이커나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아버지 부시 정권 당시 인맥인 ‘현실주의자’들의 품 안에서 출범했다고 할 수 있다. 정권 초기만 해도 ‘미국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선제 공격이나 일방주의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폴 월포위츠류의 네오콘 그룹은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체니가 맹활약하고 9·11 테러가 발생하자 국제 사회와의 협조를 주장해온 현실주의 그룹은 미국의 가치보다는 국익을 앞세운 네오콘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9·11 이후 격앙된 분위기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네오콘의 지론인 이라크 공격에까지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하고, 네오콘의 정보 조작 등 일련의 부도덕한 측면들이 폭로되는 데다가, 재정 적자가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나는 등 국내 문제까지 겹치면서 네오콘의 강경 노선은 퇴조하고 현실주의 세력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네오콘 연구가인 제임스 만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는 사실상 지난 4월께부터 부시 대통령이 네오콘의 품안에서 벗어나 아버지 부시를 닮아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라이스가 그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스승 스코크로프트를 다시 찾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 무렵부터 한반도 문제에서도 현실주의자로 돌아온 라이스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6월 열린 제3차 6자 회담이다. 이 회담은 그동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6자 회담의 돌파구를 연 중요한 회담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3차 6자 회담의 실질적인 주역이 한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손잡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즉 라이스 보좌관이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측의 3차 6자 회담 안은, 체니의 발명품이자 6자 회담의 족쇄였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더 이상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핵 문제 진전을 위해서라면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와 대북 보상 문제 등에서도 신축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다는 매우 ‘현실주의적’인 내용이었다.

라이스 보좌관은 지난 7월 한·중·일 순회 방문 때 서울에 들러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놀랄 만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해 주목되기도 했다. 최근 일본의 니혼 게이자이 신분은 당시 중국 방문 과정에서 그녀가 중국측에 6자 회담을 앞으로 동북아의 안전 보장을 논의하는 항구적 기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즉 6자 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 이를 재래식 전력 문제와 미사일 문제까지 논의하는 본격 협의체로 격상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하자는 구상이다. 여기에서도 네오콘의 일방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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