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보부가 만든 위장간첩이었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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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봉교육 받고 월북했다가 재남파되어 활동한 ‘천보산’의 양심 고백 위장간첩 총책으로 활약하며, 각계 인사들 본인 몰래 조선노동당 입당시켜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1970~1985년 서울에 위장된 북한 간첩망을 꾸려 적극 활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위장 간첩들은 중정의 교육과 통제 아래 북한으로 넘어가 장기간 대남 공작 밀봉교육을 받고 재남파된 즉시 중앙정보부의 안가로 들어갔다.

중정은 이들을 통해 수도권 각지에 간첩용 유·무인 포스트를 확보한 뒤 북한에서 보내온 공작 활동 지침과 공작금, 난수표, 단파 라디오와 송수신기 등 각종 공작 장비를 제공받았다. 중정은 이들을 통해 북한에 각종 공작 보고서와 각계 주요 인사 동향 및 포섭 실적을 올려보냈다.

중정과 안기부는 또 이들 위장간첩망을 1970~1980년대 남한에서 일어난 각종 반유신독재 시위와 빈민운동 및 노조운동 현장에 투입해 마치 실제로 북한 간첩이 암약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고, 그 내용을 공작 보고서로 꾸며 북한에 비밀리에 송신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보기관은 적지 않은 노동운동가·빈민운동가·학생운동가 들을 당사자도 전혀 모르게끔 ‘조선노동당 현지 입당자’로 둔갑시켜 북한 대남공작 부서에 보고했다.
밀봉교육 받고 조선노동당 입당

이같은 사실은 중정과 안기부가 양성한 북한 간첩 조직 책임자 조○○씨(63)와 산하 공작원 최○○씨(62)가 최근 <시사저널>에 그 조직망과 비밀 활동 실태를 털어놓음으로써 드러났다. <시사저널>은 이들이 간첩 활동 증거로 제시한 폭발물 제조법과 극세미 촬영 및 해독법, 난수표 번호, 모르스 부호, 주요 유·무인 포스트 및 접선 암호, 간첩 조직을 관리한 중정과 안기부 관계자들의 신원 및 사서함 번호 등 일체를 넘겨받았다.

또 이들의 신원을 다각적으로 확인하는 한편 이들이 위장 간첩으로 활동한 시기에 근무한 중정 대공 파트 요원 몇 사람과 조총련 관계자, 민단 관계자, 그리고 과거 각종 간첩 사건 연루자 들을 수소문해 활동 내용의 진위 여부를 종합적으로 점검했다. 그 결과 이들이 활동을 중단한 지 20여 년 만에 털어놓은 중정 통제 하의 북파 밀봉교육과 뒤이은 대남 위장 간첩 활동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판단되었다.

1970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정의 지령을 받고 북한에 넘어가 간첩 밀봉교육을 받은 조○○씨는 ‘천보산’이라는 공작명으로 다시 내려와 15년 동안 중정과 안기부의 요구에 따라 움직인 위장간첩조직 총책이었다. 천보산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중국 만주의 산 이름이다. 조씨는 1970년 9월22일 평양 근교 초대소에서 조선노동당 입당식을 갖고, 당원 번호 867번을 부여받았다. 15년 동안 공작명 천보산과 산하 간첩망을 관리한 중정 및 안기부 관계자는 김○○(1969~1973년), 황○○ 김○○ 성○○ 이○○ 김○○ 박○○(이상 1973~1985년)였다.

북한에서는 천보산에게 1960년대 말 와해된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서울지역 재건 책임자로 활동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파트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천보산 활동은 중정에서도 극소수만 알았던 특수 공작 사안이다”라고 밝혔다. 천보산을 관리했던 중정과 안기부 요원들이 실재하는지에 대해 “실명과 가명이 섞여 있는데 대부분 당시에 근무한 것이 맞다”라고 확인했다. 유신 시절 중정에서 근무한 또 다른 대공 수사요원은 “그때로서는 중정이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그 내용을 언론이 공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조씨가 1970년대 초반부터 중앙정보부의 협조 아래 꾸려서 북한에 보고한 위장간첩망은 크게 노동운동계, 빈민운동계, 부산지역 책임자 및 경남지역 책임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운동은 조씨가 직접 맡았고, 빈민운동은 최○○씨, 부산 총책은 김○○씨, 경남지역 책임은 김○○씨가 맡았다. 주로 천보산 조씨의 중고교 동창 가운데 실제 그런 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사람들이 포섭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들 중 천보산 하부 조직원인 위장 빈민운동 담당 최씨와 경남지역 담당 김○○씨는 1971년과 1974년 조씨와 중정의 지도 아래 각각 평양과 일본 조총련계 비밀 합숙소에 파견되어 밀봉교육을 받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돌아왔다. 최씨의 노동당 입당 번호는 890번. 천보산이 평양에 보낸 최씨는 “중정에서 국가를 위한 일이라기에 1971년 4월께 천보산에 포섭된 인물로 위장하고 평양으로 가서 6개월간 밀봉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그 뒤 내 임무는 천보산을 통해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직접 북한과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최근까지 국정원 직원 장○○씨가 나를 관리해왔다”라고 말했다.

천보산 조씨는 1973년에 재입북해 평양 근교에서 밀봉교육을 받을 때 조선노동당 현지 입당 추천 권한까지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가 1970년 첫 번째 남파된 뒤 2년간 남한에서 벌인 공작의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조씨는 이렇게 말했다.

“중정에서는 나에게 북한에 공작 실적을 보고할 노동운동 업소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암시했다. 당시 신진자동차에 입사해 노조운동을 하던 김○○과 청계천 판잣집 철거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광주 대단지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김○○씨가 내 고교 동창이어서 나는 이들에게 접근해 술을 사면서 친하게 지냈다. 이 사실을 중정에 보고한 뒤 이들을 배후 지도한 것으로 공작 보고서를 꾸며 북한에 보내고,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본인들은 모르게 조선노동당 현지 입당자로 올렸다. 두 사람은 최근까지도 만나는 친구지만 아직도 자기들이 입당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미안하다.”

조씨에 따르면, 그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중정의 묵인 아래 본인 모르게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킨 남한측 인사는 수십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가 서울에서 현지 입당시킨 당원 번호는 890번부터 이어졌다. 그는 한 제약회사에서 노조운동을 하던 김○○씨와 또 다른 후배 홍○○씨, 1999년 작고한 빈민운동가 출신 고 제정구 의원 등을 꼽았다. 제의원 역시 조씨와 고교 동창으로, 친구들끼리 가끔 경조사나 술자리에서 만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경남지역 고교 선후배 출신 군 간부들도 천보산의 포섭 대상이었다. 조씨는 안○○ 전 수방사령관, 유○○ 전 3군사령관, 이○○ 전 보훈처장관 등을 현역 영관 장교 시절 자기가 포섭공작을 하는 군인들이라고 북한에 보고했고, 북에서는 그의 추진력을 높이 치하했다고 밝혔다. 물론 조씨는 이들과 동창회 등지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뿐 실제 포섭에 나선 일은 없었다.

물론 북한 공작지도부가 천보산의 보고 내용을 무작정 수용했던 것 같지는 않다. 북한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조씨의 공작 활동에 대한 사실 확인을 거쳤다고 한다. 또 중정으로서도 북한으로부터 의심받지 않기 위해 몰래 현지 입당시킨 이들에 대해서는 천보산을 시켜 간헐적으로 연락해 술을 사주면서 친분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고 한다.
조씨가 1970년대에 남북한 공작 조직에서 모두 탐내는 간첩 활동에 엮여든 사연에는 남북 분단에 따른 조씨 가족사의 비극과 조씨가 대학 재학 중에 벌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숨어 있다. 경남 진주가 고향으로 일제 때 항일운동을 했던 조씨의 아버지 조○○씨는 광복 후 잠시 귀국하려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해 남해상이 봉쇄되는 바람에 일본에 눌러 앉았다.

한국전쟁 뒤 일본에서 북한계 조총련 창립 붐이 일 때 고베 지역 핵심 멤버로 활동하던 아버지 조씨는 한국의 가족과는 십수 년째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러던 조씨 부자는 1965년 언론에 큼지막하게 나온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서울 ㄱ 대학 4학년으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6·3사태) 에 가담했다가 진압 경찰에 끌려가는 조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그 해 8월 <신동아> 화보에 크게 실렸다. ‘어린 학생이 무슨 죄가 있다고…’라는 설명이 붙은 이 사진은 진압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조씨를 끌고 가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뒤에서 울부짖으며 조씨의 허리춤을 붙잡는 모습이다.

당시 이 사진은 조총련 기관지와 잡지를 거쳐 북한의 대중 잡지에까지 표지로 실렸다고 한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졸지에 남북을 통틀어 유명 인사가 되어버린 인물이 아들임을 알아챈 조씨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밀항선을 보내 아들을 불러들였다. 밀항 후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청년 조씨는 조선인이라고 놀리는 일본 야쿠자들과 패싸움을 벌이다 치명상을 입히고 일본 경찰에 수배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조씨의 다급한 처지를 파악한 조총련계 지하 조직은 그에게 대남공작 교육을 받고 한국에 들어가 활동하라고 권했다. 조씨는 약 한달간 조총련계 호텔에 틀어박혀 사상 교육을 받았지만 ‘대남공작 활동이 내키지 않아’ 도망쳐나왔고, 곧바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었다. 8개월에 거친 재판 끝에 그는 밀항 사실이 들통 나 1969년 한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중정 요원들이 나를 남산으로 낚아챘다. 그간 내 행적을 철저히 조사한 뒤 국가를 위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고민 끝에 국가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박대통령 아들 지만씨 납치 계획

중정에서는 조씨가 도망쳐 나왔다는 일본의 조총련계 대남공작 교육장에 제 발로 다시 걸어들어 가라고 종용했다. 거기서 신임을 얻어 북한으로 들어가 간첩 밀봉교육을 받고 중정으로 돌아오라는 요구였다. 당시 중정이 운영하던 마포아파트와 세운상가의 안가에서 집중적인 북파 교육을 받은 조씨는 1970년 봄 중정이 마련해준 밀항선 편으로 다시 도일해 조총련계 비밀 공작 조직을 찾아가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심사와 사상 교육을 거쳤다. 이후 홋카이도에서 북한 공작선을 타고 청진항을 거쳐 평양 순안비행장 인근에 있는 대남공작원 양성소(초대소)로 파견되었다.

평양에서는 당시 대남담당 총책이던 김중린이 직접 나와 조씨를 환대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씨 뒤에 조총련 창립에 공이 큰 부친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 때 처참하게 끌려가던 그의 사진이 크게 실린 한국·일본·북한의 여러 매체를 꺼내놓고 심사를 벌이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조씨는 이때부터 독립 가옥에서 독도법과 폭탄제조법, 폭파 훈련, 사격술 등 온갖 특공 무술과 난수표 사용 및 송신 기술을 6개월간 익혔다. 북파되기 전 중정의 안가에서도 사격과 폭파 훈련 등 특수 교육을 받았지만 북한의 공작 교육이 훨씬 정교하고 앞서 있었다고 조씨는 말했다.

북한에서는 이때 조씨를 조선노동당에 입당시킨 후 천보산이라는 공작명을 부여했다. 남파되면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 서울시 책임자로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한국 내 자생적인 사회주의 혁명 조직인 통혁당은 1960년대 말 공안 당국의 대대적 수사로 와해되고, 그 책임자 김종태씨는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조씨에게 북한에서 내린 첫 번째 임무는 김종태씨 구출을 모색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에서는 김종태씨를 구해내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비밀 작전으로 당시 국민학교 6학년생이던 박대통령 아들 박지만군을 납치해 김종태씨와 교환 협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가 아들을 서민적으로 키우겠다면서 지나친 경호가 붙지 않도록 해서 납치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6개월 밀봉교육을 마친 조씨는 일본을 거쳐 공작금 몇백만 엔을 받아들고 귀국했다. 조씨는 곧바로 남산 중정을 찾아가 한 달여에 걸쳐 북한의 밀봉교육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제출했다. 그가 이때 중정에 김종태 구출계획(박지만군 납치 계획)을 보고하자, 이후 박지만군에 대한 경호가 강화되었다.

중정과 조씨는 무인 포스트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공작금과 장비를 받는 한편 유인 포스트에서는 북한이 보낸 검열지도원을 만나 각종 지침을 받았다. 유인 포스트는 서울 동대문운동장 정문과 종로에 있는 단성사 옆 ㅂ다방 등이었는데, 북측이 보낸 검열지도원이 조씨와 만나는 동안 중정은 몰래 이들을 망원 렌즈로 촬영만 했다고 한다.

조씨는 당시 분출되던 각종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을 예로 들며 북한에 이 운동들을 지하에서 지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71년 8월12일 발생한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과 그 해 가을에 발생한 신진자동차 노조 결성 및 파업 투쟁은 이들의 지도 아래 수행된 것으로 북한에 장문의 보고서가 올라갔다. 광주대단지 사건이란 1971년 8월10일 발생한 성남 시민 3만여 명의 과격 시위를 말한다. 1968년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 정리사업으로 경기도 광주군 일대 위성 도시로 이주한 이들이 정부의 약속 위반과 생활고로 인한 분노가 폭발해 파출소와 관용차를 불태우고, 버스·트럭 등을 빼앗아 타고 서울시청으로 향하다가 경찰 기동대에 강제 진압된 사건이다.

‘도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신진자동차 노조 파업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전신인 이 회사에서 1971년 봄 어용 노조 결성에 맞서 민주 노조를 건설하자 회사측이 종업원 2백여 명을 집단 해고한 데 반발해 터진 사건이다. 1주일간 계속된 농성과 강제 진압 과정에서 파업은 회사측이 타협안을 내놓고서야 끝났다.

2차 북파 때 대남 공작 총책 김중린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조씨는 당초 예정보다 한 달 늦게 귀환했다. 그는 중정을 찾아 다시 모든 내용을 보고하고, 조선노동당 현지 입당자 물색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씨는 “북쪽 공작지도부에서는 내가 학생운동 출신이어서 노출 염려가 큰 학원 시위보다는 노조 파업이나 빈민운동 등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고, 중정에서도 웬만한 70년대 초·중반 노동운동은 내가 다 개입해 배후 조정한 것처럼 북한에 보고서를 보내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조씨의 공작 활동은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중정·안기부와 함께 수많은 사회운동 관련 공작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대신 “국가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아직 국가를 버리지 않았다. 내 모든 공작 기록은 당시 중정 2국과 8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정에서 안기부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계속 대남 공작 활동을 하던 그에게 북한은 1985년 다시 월북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내 공작 라인을 관리하던 안기부 박○○ 조정관이 지령을 전해주었다. 곧바로 북파 청원서를 작성해 안기부에 제출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보내주지 않았다.” 조씨는 이때 직감으로 북한에 자기 아버지와 가족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 넘어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안기부가 의심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안기부가 자기를 용도 폐기했다고 여긴 조씨는 ‘간첩조작 사건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때늦게 결혼을 서둘렀다. 사실상 중정과 안기부 소속 통혁당 서울시당 재건 조직책 천보산은 1985년 활동을 중단했다. 중정 시절 대공 파트에 근무했던 한 전직 요원은 “1970, 1980년대만 해도 남북한 간에 위장 간첩이 있었고, 서로 이용했다. 서로 알면서 모르는 척 선을 유지하다가도 득보다 실이 클 때는 가차없이 도태시켰다”라고 말했다.

평생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앞뒤로 총을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왔다는 조씨는, 위장 간첩 활동을 하면서 중정이 터뜨리는 수많은 간첩사건들을 보고 자신도 언젠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조씨의 천보산 공작 조직망 중에서 경남 서부지역 담당 총책 김○○씨는 최근 의문의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나머지 조직책 가운데 실제 북한에 파견되어 밀봉교육을 받고 돌아온 생존자는 조씨와 최씨 두 사람이다. 조씨는 “천보산 공작망을 포함해서 중정이 북파한 다른 모든 위장 공작원도 정보사의 ‘북파 첩보원 보상 특별법’에 준해 똑같이 보상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천보산 조직망 중 1971년 북파되어 밀봉교육을 받고 내려온 최○○씨는 얼마 전 국정원 민원실에 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국정원은 아직까지 아무런 공식 답변을 보내오지 않고 있다.

이들을 처리하는 방침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중정에서 일했던 북파 요원들도 정보사 요원들에 대한 보상 범위에 포함되도록 현재 협상을 진행 중인데 거의 타결이 임박했다. 김 아무개씨가 국회 정보위에 보상 청원을 했는데, 국정원에서는 어느 특정인만이 아니라 그 시기에 실제 활동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경중을 따져 상응하는 대접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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