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또 미국의 파트너 되나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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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동아시아 동반 진출…최근엔 중국에 맞서 신동맹 형성
1905년 5월 일본은 동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했다. 동해 해전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연합합대 사령관은 일본 사세보 항에 귀환한 5월30일, 고별 연설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장식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승리한 투구 끈은 묶어서 두라.”

하지만 일본은 한번 머리에 쓴 투구를 좀처럼 벗지 않고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일본의 근현대사편찬회는 러일전쟁의 경과를 묶은 책 <흥미있는 만큼 이해도 잘 되는 러일전쟁>에서 이같은 사실을 알리며 ‘일본은 승리의 미주(美酒)에 취했다’고 표현했다. 실제 일본은 그 뒤 1910년 한일합병을 강행하고,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으며,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종국에는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았다.

1910년 8월22일 당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이완용이 조인해 ‘조약 4호’로 정식 발효된(공식 발표일은 8월29일) 한일합병의 자세한 전말은, 일본 메이지 대학 운노 후쿠주(海野福輸) 교수가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찾아낸 <일한합병시말>(독도사 연구로 유명한 고 이종학씨에 의해 2001년 번역됨)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같은 해 5월부터 군 병력을 대거 동원해 합병 직전까지 전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이고, 국경 지대와 철도 등 주요 시설물에 대한 경비 강화에 나섰다.

승전국 자신감으로 만주 진출 정당화


일본은 한반도 지배를 공고화하는 동시에 러일전쟁 승전에 힘입어 만주 공략에 발벗고 나섰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세워 철도를 부설하고, 다롄 항을 건설했으며, 푸순 탄광(당시 아시아 최대 노천 탄광)을 개발하고 최신식 호텔을 지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편에 서 승전국이 되었던 일본은 그러나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영국·미국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독일이 갖고 있던 산둥 반도를 처리하는 문제 등을 둘러싸고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일본은 독일이 관할하던 산둥 반도를 소유하고 싶어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를 원치 않았다.

1930년대 들어서서 미국·영국과의 사이는 더 벌어졌다.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의 만주 사태 처리 방안에 불만을 품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듬해에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군축회의에서 미국·영국과 대등한 해군력 보유를 주장하며 군축 조약을 탈퇴했다.

일본은 1937년 독일과 방공협정을 맺어, 공수 동맹까지 맺었던 영국과 결별했으며, 미국과도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대립했다. 이는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동반 진출을 꾀하던 한때의 친구가 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미국은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소련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일본의 군국주의 청산 작업을 적당한 선에서 얼버무렸다. 영국 출신 역사가 니알 퍼거슨은 미국의 패권사를 다룬 최근의 저서 <콜로서스>에서, 미국 맥아더가 지휘했던 연합군최고사령부의 군국주의 청산 작업이 화려한 외양과 달리 부실하게 끝났다고 지적했다. 과거 군국주의에 복무했던 일본 공무원 중 단지 1%만 자리를 잃었으며, 미국의 점령지 지배도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존하는 간접 지배 형태로 끝났다는 것이다.

21세기로 접어들며 미국과 일본은 다시 전략적 관계를 다지고 있다. 미국이 100년 전 이미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던 중국이 실질적인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미국이 보기에 동아시아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인 일본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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