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보수 우익 세지고 커졌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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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보수 우익은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과의 검은 유착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한 이래, 혈연과 인맥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동북아 평화에 심대한 장애물로 남아 있다.
지난 1월17일 한·일 협정과 관련된 정부 문서 다섯 권이 공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이들 문서는 태평양전쟁유족회 등 전쟁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튿날 서울의 주요 언론들은 청구권 문제와 보상 액수 논란을 중심으로 대서 특필했다. 하지만 40여 년 만에 어렵사리 빛을 본 ‘문서 공개’ 효과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언론의 관심은 곧이어 공개된 문세광 저격 사건(1974년) 문서로 옮아갔고, 때마침 10ㆍ26 박정희 저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논쟁이 겹쳤다. 이 때문에 모처럼 마련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역사 평가’의 무대는 ‘죽은 박정희’가 ‘무혈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결코 과거지사가 아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40년 전에도 미국은 한ㆍ일 양국을 상대로 한·미·일 3국을 잇는 안보 사슬을 완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그 노력의 정점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있다.

<시사저널>은 이같은 문제 의식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의 전후 내막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우익 세력의 강고한 군국주의 편향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일관성이 새삼 드러났다.


한·일 두 나라의 정식 국교는 1965년 6월22일 한·일 기본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수립되었다. 이보다 앞서 한국에서는 1961년 쿠데타를 통해 만주 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고,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패전 직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1957년 총리가 되어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미·일 안보조약, 이른바 ‘신안보조약’을 강행 처리하고(1960년) 물러났다.

최근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된 빅터 차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역사를 공유한 두 나라가 역사적 적대감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국교 정상화에 ‘골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당시 양국 지배 엘리트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꼽는다. 한국의 경우,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금과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업적, 즉 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경우, 최소 비용으로 한·일 수교 효과(한국 시장 진출)를 최대한으로 키우기 위해 박정희를 최적의 파트너로 여겼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일본 보수 우익 정권의 ‘검은 유착’은 이렇게 해서 성립되었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에 정치 자금이라는 뒷돈을 대고, 일본은 그 대가로 배상금이 투자될 한국의 국가적 프로젝트(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70~71쪽 딸린 기사 참조).

하지만 이는 전체 사태의 일면일 뿐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진정한 막후는 미국이었으며, 이를 추동시킨 힘은 ‘강력한 반공 전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었다. 여기에 전후 국가 운영을 담당한 보수 우익 정권이 일본의 안보를 미·일 동맹을 통해 보장받으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 안보, 일본은 경제 부흥”

당초 일본은 과거 식민지 백성이었던 한국인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예컨대 전후 세 번에 걸쳐 일본 총리를 역임하며 이른바 ‘55년 체제’의 토대를 닦은 요시다 시게루는 패전 직후,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일본으로 들어오던 원조 식량 문제를 거론하며 “이같은 귀중한 식량을 ‘조센징’에게 먹일 수 없으니, 한명도 남기지 말고 본국으로 쫓아내 달라”고 요청했던 인물이다.

그런 일본의 보수우익 정권이 당초 입장을 바꾸어 한·일 수교 협상에 나선 것은 ‘비교적 싼값’에 수교를 흥정할 수 있는 새 협상 파트너(박정희 정권)를 만났다는 것 외에도, 패권국 미국에 편승해 일본의 안전과 장래를 도모하는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국 편승 전략은 요시다 시게루 이래 일본 보수우익 정권의 ‘변함 없는 사고 방식’이 되어 왔다. 패전 전 영국 대사를 지낸 요시다는 1950년대 자기가 집권했을 때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을 성립시켰다. 이 독트린의 골자는 일본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 부흥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그 뒤로 미·일 동맹 강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보수 정치인이 기시 노부스케다. 그는 원래 태평양전쟁 때 만주국 경영을 책임졌던 유능한 군국주의 관료였다. 바로 이 점이 태평양전쟁 때 전시 내각 책임자로서 패전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도조 히데키와 달리, 그가 A급 전범이었음에도 살아나 훗날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일본 점령군 사령부 내 첩보 활동을 총지휘했던 부서인 참모2부(G2)가 맥아더 사령관에세 그를 석방하라고 탄원한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다하라 소이치로는 최근 자신의 저서에서 기시가 석방된 이유를 ‘미국의 냉전 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꼽았다.

1957년 일본 총리가 된 기시는 1951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었던 안보조약 내용을 한층 강화한 개정안(신안보조약)을 일본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할 경우 일본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병참 등 지원 업무를 맡는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미국은 한국전쟁 이래 일본을 강력한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숙원을 이루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자위권 강화’를 내세우며, 재무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길을 텄다.

한반도 직접 폭격 시나리오도 준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기시 총리 사이에 성립한 신안보조약은 일본 현대사가들이 ‘60년 체제’라고 부를 정도로 이후 일본 정치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안보조약 개정안 통과를 추진한 보수 진영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투쟁한 진보 진영의 대립(이른바 ‘안보 투쟁’)은 격렬했다. 신안보조약이 성립한 뒤, 기시는 소요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이후 일본 정치는 확실한 자민당 지배 체제로 돌입했다.

미·일 신안보조약이 체결된 지 5년 만에 이루어진 한·일 수교는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 사슬을 완성한 과정이었다. 미국은 1958년 무렵부터 비밀리에 중국·북한 등을 겨냥한 공격 시나리오를 준비해왔다. 미국 태평양해군사령부 또는 미국 전략공군사령부 등이 앞다투어 만든 핵 공격 시나리오들이 대표적이다. 미국과 일본이 신안보조약을 서두른 배경에는, 이같은 핵 공격을 위해 일본이 ‘불침 항모’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청이 1963년에 만든 이른바 ‘삼시 작전’ 계획도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66쪽 상자 기사 참조).

한·일 국교 정상화가 임박한 시점을 전후해서 미·일 고위 군사 관계자들이 양측을 오가며 신안보조약에 따른 역할 분담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각종 비밀 논의가 한층 더 속도를 냈다. 이는 ‘쇼와 40년도(1965년) 협동작전계획’(일명 ‘플라잉 드래곤’ 계획)·‘불런 계획’ 등 각종 극비 군사 작전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군사작전의 공통점은,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비상 사태가 발생해 미군이 출동할 때, 일본 자위대가 어떻게 이를 뒷받침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 시나리오 가운데에는 대한해협·타이완 해협 봉쇄뿐만 아니라 한반도 및 중국에 대한 직접 폭격까지 들어 있다. 미국과 일본의 처지에서 보자면, 원활한 공동 작전 수행을 위해서도 한·일 관계 정상화가 절실했던 셈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이들 계획이 기존 ‘수세’ 입장에서 ‘공세’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 전문가 하야시 시게오는 당시 군사 작전 내용을 검토한 한 문건에서 일본은 이미 1960년대에 평화헌법에 규정된 자위권의 범위를 넘어서는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논평했다.

‘기시-후쿠다-아베 라인’이 일본 정계 장악

문제는 1950·1960년대 일본의 보수·우익을 지배한 사고 방식이 일본 정치 특유의 혈연·인맥을 타고,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왼쪽 계보도 참조). 예컨대 2002년 5월 ‘일본이 핵을 보유하지 말라는 말은 일본 헌법 어디에도 없다’는 기시 노부스케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며 일본의 핵 보유 가능성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던 현 자민당 간사장 대리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또 당시 관방장관으로서 아베를 두둔해 물의를 빚은 후쿠다 야스오는 기시 노부스케의 맥을 이은 후쿠다 다케오의 아들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역시 인맥과 혈연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미·일 동맹의 일본판 실행 파일인 ‘삼시 작전’을 만들 때 방위청 장관이던 고이즈미 준야다. 고이즈미 총리는 후쿠다 다케오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는데, 이는 생전에 후쿠다와 절친했던 고이즈미 준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현재 일본 보수파 내부에도 미국의 신보수파(네오콘)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이너 서클’(다카파)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주장한 이시하라 신타로(현 도쿄도지사), 나카가와 이치로(아베 신조와 함께,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경한 비타협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카가와 쇼이치의 아버지) 등이 회원으로 있는 ‘세란카이(靑嵐會)’이다. 이 모임 회원인 와타나베 쓰네오(요미우리 신분 사장)는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 때 기자 신분으로 막후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70~71쪽 관련 기사 참조).

이들 일본 우익 인사들은 식민 통치의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보통 국가’를 외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공통점은 대외 행동 방침에 대한 뿌리 깊은 사고 방식이다. 자기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바깥의 위협’을 구실로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 동아시아 패권을 도모하려 한다. 이들은 또한 동아시아에 합류하기보다는 동아시아 바깥에서 공동체를 외치고 있다.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던 일본 정치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중·일 관계 정상화를 성사시킨 다나카 가쿠에이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훗날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물러났다.

일본의 정치 평론가 사다카 마코토(佐高信)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정치 판도는 ‘기시-후쿠다-아베’ 라인으로 이어지는 보수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다. 그는 또, 이 인맥의 공통점을 ‘강력한 반공’과 ‘친미 성향’이라며, 현재 이들을 견제할 대안 세력이 없다는 것이 일본 정치의 커다란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다나카 가쿠에이 세력이 몰락한 뒤, 반대 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는 한·미·일 삼각 관계는 물론 남북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에도 심대한 영향을 준다.

‘한반도는 일본을 향한 비수이자, 대륙 진출의 징검다리’라는, 대를 이어 계승되는 일본 지배 계급의 사고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일본은 장차 동북아 평화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데 심대한 장애로 등장할 수 있다. 원로 통일운동가 정경모씨가 ‘일본 배제론’을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68~69쪽 관련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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