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참여정부 ‘원수’ 되나
  • 고제규·차형석 기자 ()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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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7월 초에 ‘줄줄이 파업’…사회통합적 노동정책 시험대 올라
벼랑 끝까지 치닫던 조흥은행 파업은 6월22일 노·사·정의 극적 대타협으로 닷새 만에 최종 타결되었다. 공권력 투입이나 은행 전산망 다운과 같은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극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노·사, 여야 정치권은 ‘대화로 해결되어 환영한다’는 논평을 냈다. 그러나 조흥은행 파업 타결로 노·정 갈등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노동계의 ‘하투(夏鬪)’가 줄줄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굵직굵직한 파업 일정이 잡혀 있다. 6월24일 전국궤도연대(부산·대구·인천 지하철)가 1인 승무제 폐지를 요구하는 파업을 예고했고, 전국철도노조는 철도구조개혁법안 입법화 중단을 요구하며 6월28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민주노총은 경제자유구역법 폐기와 NEIS 시행을 반대하며 6월25일 4시간 시한부 파업 등 총력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고, 7월2일부터는 현대자동차 등 대형 사업장이 임단협 파업을 할 기세이다.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은 “조흥은행 파업은 타결되었지만 6·30 한국노총 총파업은 예정대로 강행한다. 노동 정책 후퇴에 항의하기 위한 총파업이다”라고 밝혔다.지난 6월20일 서울지방경찰청 강당.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날 중앙 부처 실·국장 7백여 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전년도에 비교하면 노사 관계가 대단히 안정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문이) 면은 많고 쓸 것은 없어 노사 관계에 집중해 쓴다”라며 언론 보도에 불만을 나타냈다. 조흥은행 파업 등 연일 ‘하투’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의외였다.그러나 노동부가 2003년 6월20일 집계한 전년 동기 대비 분규 현황과 노동 손실 일수, 분규 참가자 수를 참고하면 노대통령의 ‘안정된 노사관계론’은 일견 이해가 간다. 지난해 6월까지 발생한 노사 분규는 1백95건이었고, 조정 신청 건수도 5백65건에 이르렀다. 분규 참가자는 6만3천7백명이었고, 노동 손실 일수는 67만4백여일 이었다.

반면 올해 6월까지의 분규 발생 건수는 100건, 조정 신청 건수는 3백27건이다. 수치로는 작년 동기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분규 참가자와 노동 손실 일수도 각각 2만8천9백여명과 17만4천2백여일로 지난해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 노·사·정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난해는 월드컵 때문에 파업이 6월 이전으로 앞당겨졌고, 올해 ‘하투’는 이전의 ‘춘투’와는 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파업 시기가 ‘춘투’에서 ‘하투’로 이동했다. 예년 같으면 3월부터 임금 협상에 들어가 5월1일 노동절부터 투쟁을 본격화해 ‘5말6초’에 집중적으로 임단협 투쟁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6말7초’로 한 달 정도 늦추어졌다.

양대 노총 관계자들은 시기를 일부러 6말7초로 맞추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손낙구 민주노총 선전실장은 “올해는 산별노조 별로 교섭하기 위해 교섭 형태를 갖고 줄다리기를 해서 늦추어진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노총 강훈중 홍보국장은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을 지켜볼 시간이 필요했고, 이라크 전쟁과 경기 침체로 교섭 일정이 늦어졌다”라고 말했다.

올해 노사 분규는 쟁점이 다양하고, 단위 사업장에서 노·사가 풀기 어렵다는 점도 특징이다. 올해 양대 노총의 임금 인상 요구안은 11%이다. 예년의 13% 선에 비하면 인상 요구 수준이 낮아졌다. 경기 침체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 이외 근로 조건과 제도 개선 요구는 지난해보다 많아졌다. 현재 양대 노총과 산별 노조가 요구하는 근로 조건 저하 없는 주5일근무제 도입, 철도개혁법안 철회, 경제자유구역법 폐기, NEIS 문제는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한 사안이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온건 노선을 걸어온 한국노총이 총대를 먼저 메고 나섰다는 점도 2003년 ‘하투’의 특징이다. 조흥은행 파업이 타결되기 전 한국노총은 “공권력을 투입하면 참여정부와는 임기 말까지 원수 관계로 남고, 노사정위를 탈퇴하겠다”라고 경고했다.

한국노총이 강성으로 나선 데에는 참여정부에서 한국노총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위기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협상과 타협에 중점을 둔 한국노총은 역대 정부에서 정부의 제1 대화 파트너였다. 노동정책 협의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노동계 대표 주자로서 위상을 지녔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인사는 대부분 민주노총 출신이었다. 국민의정부 출범 전에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한국노총과 정책연합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양대 노총 소속 조합원 숫자의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2001년 말 현재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64만명, 한국노총 소속 조합원 87만명이다. 아직은 ‘제1 노총’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이런 속도라면 언제 추월당할지 모른다. 게다가 지난해 철도노조와 지하철노조 3만 조합원이 한국노총을 탈퇴해 민주노총에 합류했다. 그동안 한국노총을 주된 대화 파트너로 삼았던 노동부도 양대 노총을 동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한국노총 관계자들은 위기 의식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강훈중 한국노총 홍보국장은 “참여정부에서는 투쟁하는 사업장이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기류가 있다. 산하 노조에서도 대화와 협상만 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이 조흥은행 노조 출신이라는 점도 하투 초반에 강성으로 나선 한 요인으로 풀이된다. 조흥은행 노조는 파업에 한국노총이 최대한 지원하지 않을 경우 탈퇴하겠다고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고 해서 민주노총과 참여정부와의 긴장 관계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대화 채널이 생긴 것은 긍정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정책이다. 방미 이후 정책이 갈지자를 걷고 있다. 정책이 반 개혁적이면 충돌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참여정부의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은 ‘하투’를 맞이해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성희 연구위원은 “6말7초 한 달은 참여정부 5년 동안의 노·정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조흥은행 파업 타결 이후 6월23일 기자회견에서 김진표 부총리는 “정부가 협상에 나서지 않았으면 팔짱 끼고 수수방관한다고 공격하지 않았겠나. 불법 파업이라도 대화와 타협이 우선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계의 요구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내놓을 해법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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