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도한 경제, 언제 깨어날까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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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침체하고 투자 부진해 ‘중증’…“내년 초에 본격 회복세 돌입”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7월12일 오전 1시께 서울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체감 경기를 확인하러 간 그에게 상인들은 “장사가 너무 안된다. IMF 때보다 경기가 나쁘다”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세계 경제 침체와 북한 핵·사스·노사 문제 등으로 경기 침체가 불가피했지만,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펴고 있는 만큼 하반기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부총리의 설명이 상인들에게 먹혀들었을까.

7월14일 오전 11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하반기 경제운용계획 발표와 이보다 앞서 있었던 경제팀 수장의 민생 점검 행차는 경기 부진의 파고가 심상치 않음을 드러냈다. 물론 1997년 외환 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는 상인들의 주장은 과장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올 1/4분기 경제성장률이 3.7%에서 2/4분기 2% 안팎으로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마이너스 성장으로 급전직하한 당시와 맞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장 상인·음식점 주인 같은 이른바 소규모 자영업자와 한계사업장·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미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 경기 부진의 최대 주범은 소비 침체다. 지난해 강력한 버팀목 구실을 했던 소비 붐이 경기 침체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돌변한 것인데 소비의 경기 변동성은 외환 위기 이후 크게 높아졌다. 도·소매 판매와 내수용 소비재 출하 같은 소비 관련 지표들은 지난해 1/4 분기를 정점으로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올 들어 마이너스로 악화했다. 소비 위축이 경기 침체의 주범이 된 것은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급팽창했던 가계 신용의 거품이 올 들어 꺼지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인 1993년 20.3%에 그쳤던 금융기관들의 가계 대출은 2002년 말 무려 44.7%로 급증했다. 여기다 신용카드사에 대한 대출(현금서비스+카드론)도 폭증했다.

현재 소득을 넘어선 빚으로 누리는 소비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자명하다. 올 들어 빚을 못 갚는 사람이 속출하자 은행과 신용카드사들은 일제히 가계 대출을 줄이는 것은 물론 회수(추심)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3백15만명(5월 말 현재)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로 나타났다.


경제 성장을 일구는 소비· 투자· 수출이라는 세 주체 가운데 수출만이 제구실을 하고 있을 뿐 투자 역시 부진하다. 투자 가운데 건설 투자 부문은 ‘빌딩 건설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할 만큼 홀로 맹활약 중이지만, 기업들의 설비 투자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00년 1/4분기를 정점(60%)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는 설비 투자는 2002년 반짝 상승세를 탔지만 올 들어 증가세가 뚝 떨어졌다.

예상보다 심각한 소비와 투자 침체로 2/4분기 성장률이 1/4분기보다 떨어지자 정부는 위기감을 느꼈다. 통화 신용 정책의 최고 의결 기관인 금융통화위원회가 7월10일 콜금리를 5월에 이어 다시 0.25% 포인트 내리고, 정부와 국회가 7월14일 4조5천억원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잠정 합의하고 특별소비세 및 근로소득세를 인하(세 경감 효과 5천5백50억원)하는 등 경기 부양 카드를 총동원했다. 올해 3% 성장도 어렵겠다는 위기감의 소산이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 같은 대표적인 경제 전망 기관들은 지난 4월 올해 성장률을 4%대로 낮추었다가 최근 3% 초반으로 재차 수정했다.

소비 부진이 경기 침체의 주범이지만, 정작 정부 정책의 초점은 화끈한 소비 진작책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이례적으로 하반기 경제 운용 계획은 기업 설비 투자 활성화와 외국인 직접 투자 유치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재경부는 왜 투자 활성화라는 에둘러 가기 전략을 선택했을까. 하반기 운용 계획 편성의 실무 사령탑인 재경부 박병원 경제정책국장은 “노대통령의 단기적인 성장률 높이기에 급급하지 말라는 지시가 결정적이었다”라고 귀띔한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경기 진작책을 짜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 하반기 한국 경제 전망을 놓고 이른바 ‘L자형’과 ‘U자형’ 논쟁이 재연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U자형에 무게를 두는 이들이 더 많다. 한국개발연구원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완만한 회복세를 점쳤다. 북한 핵·사스 같은 상반기 경제를 옥죄던 불확실성이 사라졌거나 최소한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3/4분기론도 나오지만, 김진표 부총리가 2/4분기가 경기 저점이 될 가능성을 언급해 2/4분기 바닥론이 공식화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완만한 회복세를 점치는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회복 속도와 강도는 조금씩 다르다. 씨티은행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은 음식점·찜질방·다방 주인이나 시장 상인 같은 소자본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임금 노동자 못지 않게 큰 나라다”라며 불황의 가장 큰 원인인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한 경제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앞으로 소비가 크게 좋아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국 등 세계 경제의 회복 징후가 완연해지는 내년 초쯤에는 경기가 본격 회복세를 타지 않겠느냐는 데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정부는 물론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이 심리적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노사 문제 같은 사회 불안 요인을 중시하는 것은 이것이 경기 침체의 주범은 아니지만, 소비와 투자 위축 등 경제 심리를 더 얼어붙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금융통화위원회 김태동 위원도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경제 심리가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지속적인 경제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낙관적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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