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정치 자금 자료 모조리 폐기했다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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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서류 파기·컴퓨터 교체해 ‘증거 인멸’…후계 구도 자료도 없애
검찰이 정치 자금 수사에 속도를 내려고 기업들에 ‘최대한 선처’와 ‘본질적 수사’라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설령 검찰이 SK처럼 구조조정본부나 회장 총괄 조직에 대해 압수 수색을 벌인다 해도 건져낼 자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삼성·LG·현대자동차·롯데 등 정치 자금 수사 선상에 오르내리는 그룹 대부분이 문제가 될 만한 자료 가운데 인쇄된 자료는 모두 파쇄했으며, 구조본이나 회장 총괄 조직 관계자들의 컴퓨터와 서버를 아예 전면 교체해 원천적으로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수사에 단서가 될 만한 영양가 있는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11월7일 대검찰청 안대희 중앙수사부장은 “기업이 고의로 증거 자료를 은폐하거나 폐기하면 개별 기업에 따라 비자금 조성 기업의 본질적 문제를 수사 대상으로 삼겠다”라고 강경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몇몇 기업 관계자들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혹은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자료 폐기 및 컴퓨터 교체를 언제 시도한 것일까.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직접적인 계기가 지난 2월 검찰이 전격적으로 SK 구조조정본부(구조본)를 압수 수색한 직후부터라고 밝혔다. 내부 관계자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그룹의 핵심 조직인 구조본이 압수 수색을 당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자 재계는 경악했고, 이 때부터 드러나면 곤란한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안 검색도 크게 강화했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 9부(현 금융조사부)가 SK 구조본과 회장실, 문서 저장고인 ‘선혜원’을 뒤져 자료를 몽땅 가져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두 다 아는 일이다. 검찰은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식으로 손쉽게 수사한 반면, 자료를 몽땅 빼앗긴 SK는 ‘아야’ 소리 한번 못하고 무장 해제를 당했다.

그렇다면 자료 폐기가 이번 정치 자금 수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지난 2월 자료 폐기 및 컴퓨터 교체를 단행한 삼성·LG·현대자동차는 대선 자금이 전면 수사 선상에 오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때 정치 자금 관련 서류도 파기했다고 한다. 정치 자금이라는 민감한 대목이 알려져서 하등 좋을 일이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노후보 당선 후 재계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대부분의 재벌 그룹이 다른 후보에게 줄을 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허인 상태에서 재계가 유비무환 차원으로 대선 자금을 포함해 ‘문제 품목’ 관련 자료를 파기했다는 것이다. 일부 발 빠른 기업들은 지난해 말부터 검토에 착수해 지난 1월부터 폐기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SK 압수 수색이라는 전무후무한 공권력 행사가 기업들의 자료 폐기 사태를 촉발한 셈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공정위의 부당 내부 조사 같은 것만 있어도 자료를 없애는 것이 재계의 생리인데, 부담스러운 정권이 출현했으니 당연한 반작용이다”라고 설명했다.
대선 자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삼성과 현대자동차의 경우 후계 구도 관련 자료도 발본 색원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연말 감사철이 아닌데도 삼성SDS 등 몇몇 계열사에 삼성 구조본 경영진단팀(옛 감사팀)이 마치 검찰이 SK를 덮치듯 급습한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당시 때아닌 감사에 대해 이 회사에서는 이재용 상무 관련 자료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시스템 통합 회사인 삼성SDS는 이재용 상무에게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제공했던 핵심 계열사다.

현대자동차의 경우도 정치 자금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 관련 자료 폐기가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자동차는 한나라당을 적극 지원한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정몽준 의원의 출마로 이른바 꽤씸죄를 우려했고,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은 후 정의선 부사장(정몽구 회장의 장남)에게 물려주는 체제를 본격 출범시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이상수 의원이 검찰에 소환된 후 5대 그룹 조사설이 흘러나오자 해당 기업들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매조지를 했다고 한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기획총괄본부와 마케팅 지원실 관계자의 컴퓨터를 다시 한번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자금 관련 자료를 없앴다고 해서 기업들이 느긋한 것은 물론 아니다. 기업 정보팀이 여의도 정치권과 서초동 검찰 청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이들의 동향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사실이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몹시 불안해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관련 자료를 전부 없앴다고 해도 검찰이 계좌 추적에 들어가 돈의 흐름을 회계 장부와 정밀하게 대조하면 이상한 구석이 나올 수 있다. 검찰이 당연히 소명을 요구할 것이므로 ‘완전 범죄’가 되기 어렵다.”

노무현 후보 캠프에 대한 자금 제공자는 거의 뚜껑이 열렸다. 삼성(10억)·LG(20억)·SK(25억)·현대자동차(10억)·롯데(7억) 등 5대 그룹이 72억원을 냈으며, 동양·동부·삼양·풍산·태평양·코오롱건설·길의료재단·포스코건설·교보생명·효성·태영 등 12개 그룹 및 법인이 24억5천만원을 냈다.

“검찰 도왔다가 정치권에 찍히면 큰일”

이 돈은 영수증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합법적인 후원금으로 볼 수 있다.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한나라당에 제공된 합법적인 후원금도 관심을 끌지만, 역시 최대 관심거리는 양당이 어떤 기업으로부터 불법 자금을 얼마나 받았느냐에 있다. 검찰이 전경련을 통해 고백하면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에서 최대한 선처하겠다고 밝혔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받은 사람이 실토해야지 왜 준 사람더러 고백하라고 하느냐’는 고전적 저항에서부터, 괜히 검찰을 도왔다가 정치권에 찍히면 우리만 낭패본다는 ‘후환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처음 소환된 기업의 인사가 검찰에서 어떻게 조사받았는지를 파악한 후 최종 입장을 정하려고 한다.

검찰은 안대희 부장의 최후 통첩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좌고우면하자 심상치 않은 말을 흘리고 있다. 비자금을 많이 조성한 단서가 확보된 2∼3개 그룹에 대해 계좌 추적은 물론 사무실 압수 수색까지 실시한다는 것이다. 자백과 상관없이 본질적인 부분을 수사하겠다는 말도 나온다. 검찰의 노림수는 분명해 보인다. 기업들의 고백을 유도하는 마지막 제스처를 함과 동시에 정면 돌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검찰로서는 경제에 주는 충격을 걱정해 수사의 파장을 최소화하려 했으나 기업들이 부응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확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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