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뉴스] ‘적군파 여왕벌’ 시게노부, 테러에서 체포까지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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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테러 사건의 실질적 배후 시게노부 체포 ‘30년 만의 귀국’ 이유는 조직 재건
1970년대와 1980년대, 세계 곳곳에서 잇달아 인질 테러 사건을 일으켜 악명을 떨친 일본 적군(赤軍)의 최고 간부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55)가 지난 11월8일 오전 오사카(大阪) 부 다카쓰카(高槻) 시내의 호텔 앞에서 체포되었다. 그녀가 세계 동시 혁명을 꿈꾸며 국제 테러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을 떠나 레바논으로 간 지 29년 만의 일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시게노부는 위조 여권을 가지고 2∼3년 전 일본에 입국해, 다카쓰카 시내의 한 아파트에 숨어 지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지난 7월 하순 시게노부를 닮은 여성을 목격했다는 제보를 입수하고, 과격파 그룹들의 아지트를 은밀히 감시해 왔다. 그러던 차에 한 아파트에 중년 여성이 드나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오사카 경찰은 그 중년 여성이 들른 다방 등에서 채취한 지문을 확인한 결과 그녀가 시게노부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경찰은 그 후에도 이 여성이 담배를 피는 모습 등을 세심하게 관찰해 시게노부임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지난 11월8일 오전 일본 적군 모임에 참석하려고 호텔을 나서는 시게노부를 체포해 감금·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시게노부는 도쿄 세다가야(世田谷)의 극빈 가정에서 태어나 억척스럽게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도쿄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계를 돕기 위해 식품회사에 취직한 그녀는 고졸과 대졸의 처우에 심한 격차가 있음을 깨닫고 부모 몰래 메이지(明治) 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일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이른바 ‘안보투쟁’ 시위가 길거리를 휩쓸고 있었고, 학원가에서는 각목과 화염병이 난무했다. 시게노부도 입학금을 내기 위해 메이지 대학에 들렀다가 학비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퇴학당한 학생이 복학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시위 대열에 참가했다.

시게노부는 그 후 좌익계 학생 그룹이 점거한 한 대학에 각목 2백개를 날라다 주어 ‘여성 흉기 반입 제 1호’로 일약 유명해졌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이 높이 평가되자 시게노부는 더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벌이기 위해 1969년 조직된 ‘공산주의동맹 적군파’의 간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 노선이 과격해 일본 국내의 지지자들이 점차 떨어져나가자, 적군파는 ‘국제 근거지론’을 내걸고 해외에 혁명기지 건설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투쟁이 1970년 3월 일본항공 요도호 납치이다. 적군파 대원 9명은 요도호를 후지산 부근에서 납치해 김포공항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북한에 적군파의 혁명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시게노부도 중동에 혁명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1971년 적군파 대원과 위장 결혼한 후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잠입해 ‘일본 적군’을 결성했다. 시게노부는 당시 레바논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군사조직 팔레스타인인민전선(PFLP)과 공동 전선을 모색했다.

그 결과 ‘일본 적군’이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는 인질 테러 사건을 차례로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 적군이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은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테러이다. 일본 적군 멤버 3명이 텔아비브 공항에서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여행객 24명을 살해하고, 76명을 부상시킨 사건이다. 일본 적군 2명은 현장에서 자폭하고, 1명은 체포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일본항공기를 납치해 리비아에 착륙시키는 하이재킹을 벌였다. 또 1974년 1월에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함께 싱가포르의 정유소를 폭파하고, 쿠웨이트 주재 일본대사관을 습격해 대사를 인질로 잡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일본 적군 3명이 프랑스대사관에 난입해 대사 등을 인질로 잡고, 파리에서 체포된 대원 1명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1975년 8월에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미국·스웨덴 대사관을 동시에 습격해 53명을 인질로 잡고 일본에서 복역 중이던 대원 5명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1977년 9월에 일어난 이른바 ‘다카 사건’에서는 대원 6명을 석방시켰다. 인질로 잡은 승객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6백만 달러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 후에도 자카르타(1986년 5월), 로마(1987년 6월), 나폴리(1988년 4월) 사건 등을 일으켜, 피해를 본 당사국들은 일본 적군 멤버들을 국제 사회에 수배해 왔다. 일본 경찰은 일련의 인질 테러 사건 배후에서 일본 적군의 최고 간부인 시게노부가 중심 역할을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바논에 잠적한 것으로 알려져 온 시게노부가 30년 가까이 지난 뒤 일본에 다시 나타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우선 국제 정세와 중동 정세의 급변을 들 수 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82년 레바논에서 철수하면서 일본 적군은 팔레스타인인민전선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냉전 종식과 중동 평화 협상 진전으로 아랍 국가들이 외인부대나 마찬가지인 일본 적군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 예가 일본 적군이 본거지를 두고 있는 레바논의 치안당국이 1997년 일본 적군 멤버 5명을 구속한 일이다. 이들은 지난 3월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으며,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을 일으킨 주범 오카모토를 제외한 4명이 국외 추방되어 모두 일본 경찰에 인계되었다.

그밖의 일본 적군 멤버들도 남미나 유럽에서 체포되어, 시게노부를 제외하고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일본 적군 멤버는 6명에 불과하다.


일본 경찰, ‘최후 반격’ 대비해 경계 강화

때문에 전문가들은 시게노부가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일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다. 오사카 경찰도 시게노부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새로운 조직 구상을 시사하는 문서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혁명당 강령과 강령 해설로 밝혀진 이들 문서에는 노선 대립 때문에 흐트러진 국내 조직과 지원자 그룹을 묶어 전투적인 조직으로 재편성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거점을 마련했던 적군파 요도호 그룹이 일본 내에서 다시 활동 거점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요도호 납치범 9명 중 현재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멤버는 4명이다. 이들은 처자식들을 일본에 귀국시키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요도호 그룹과 일본 적군은 최근 다시 관계를 복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왕벌’ 시게노부가 체포되어 일본 적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일본 내에 좌익 과격파가 만여 명 존재하고 있고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일본 적군 멤버도 6명 남아 있어, 그들이 ‘여왕벌’을 구출하기 위해 반격에 나설 가능성도 크다. 일본 경찰은 1970∼1980년대와 같은 최악의 인질 테러 사건이 일어날까 봐 경계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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