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푸른 검찰, 벌벌 떠는 대기업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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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비자금 수사 ‘속도전’…현대차·삼성 적극 협조, LG·롯데는 ‘미온’
검찰 주위를 아무리 ‘쑤셔도’ 나오는 것이 없어 아예 포기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정보팀 소속 한 직원의 하소연이다.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가 가파르게 진행되자 기업들은 자사 정보팀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업 정보통들은 보고할 만한 첩보를 얻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다. 과거와 달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워낙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기업 정보 수집 요원도 마찬가지다. 기업 정보팀 임직원을 만나 정보를 얻지 검찰을 통해 수집하는 정보는 거의 없다. 국내 정보 수집과 관련해 국정원의 위상이 급강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사 대상에 오른 기업들도 안팎으로 보안 에 철저하다. 최고 경영진까지 수사 대상에 올라있는 상황에서 언론에 부각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중수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잔뜩 겁을 먹고 있다.

금호그룹 임직원 “사장 소환 신문 보고 알았다”

LG홈쇼핑 전략기획팀 관계자는 “검찰이 자료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요청을 받았다면 경영진이 다른 사안과 달리 전략기획팀에게도 알리지 않고 ‘쉬쉬’한 셈이다”라고 말했다. 오남수 금호그룹 전략경영본부 사장이 11월17일 검찰에 소환되었으나 본부 산하 임직원들은 소환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았다. 대선 수사와 관련해 정보가 나올 수 있는 창구가 모두 폐쇄되자 기업들은 중수부의 수사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기업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거나 변화 추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가장 당혹해 한다. 예측할 수 있는 위험 요소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가시 거리가 1m도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하면 기업들은 속수무책이다. 대선 자금 수사는 사안도 사안이지만 그 진행 방향과 폭을 가늠할 수 없어 기업 경영진에게는 더 공포스럽다.

대검 중수부는 불법 대선 자금과 관련해 정치권보다 상대적으로 수사하기가 쉬운 기업들을 대상으로 ‘공포와 채찍’을 동원하고 있다. 그룹 총수까지 출국을 금지하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들은 압수 수색을 벌인다. 하지만 혐의를 받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중수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다.

수사에 가장 적극 협조하고 있는 기업이 현대자동차와 삼성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는지 검찰에게 모두 알려주라고 직접 지시할 정도라고 한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11월20일 기자 간담회에서 “현대차는 한나라당에 법인 명의로 3억원, 임직원 24명 명의로 9억원 등 총 12억원을 건넸다. 이 혐의는 현대차가 제출한 자료에서 나왔고 회사도 회사 돈이라고 자백했다”라고 말해 현대자동차가 수사에 협조적이라는 것을 간접으로 확인해 주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대선 자금 지원이 불법이 아니라 편법이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현대자동차 못지 않게 수사에 협조적인 기업이 삼성그룹이다.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이 10월30일 대검 수뇌부를 만나 삼성의 입장을 설명하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지난 2년 동안 이건희 회장 장남 이재용 상무의 편법 상속 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이골’이 났다. 이 과정에서 검찰 인맥도 다져놓았다. 삼성은 전·현직 임직원 명의로 건넨 3억원에 대해서는 이미 상여금 명목으로 처리해 회계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또 압수 수색에 대비해 컴퓨터와 문서를 깨끗이 정리했고 안내 요원도 검찰이 들이닥치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남자로 바꾸었다.

삼성은 임직원 소환이 임박하자 김용철 법무팀 전무를 중심으로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김전무는 서울지검 검사 출신(사법고시 25회)이어서 검찰 관련 업무를 오래 전부터 처리해왔다. 삼성의 고민은 누가 희생양이 되느냐이다.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삼성도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혐의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로 인해 멍에를 짊어지게 될 실무진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았지만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으면 섣불리 자료를 제출할 수도 없는 처지다. 삼성은 현재 민주당에 건넨 3억원을 제외하고는 아직 발표한 내용이 없다.

자료 제출이 늦어지자 중수부는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처로 삼성전기를 지목하고 11월24일 삼성전기 수원 본사와 강호문 삼성전기 사장 집에 대해 전격적으로 압수 수색을 벌였다. 삼성전기는 하청 업체인 동양전기와 거래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공포 작전이 먹혀들지 않아 채찍까지 동원한 기업이 LG다. LG는 대선 자금 수사에 가장 비협조적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강유식 ㈜LG 부회장은 그룹 임원회의에서 “정치권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법정 한도 이상의 정치 자금을 주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문제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평소 강직하기로 소문난 강부회장이 불법 대선 자금 조성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으나 구조조정본부장이라는 직책상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강부회장 윗선에서 수사 협조에 미온적이지 않았겠느냐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LG의 비자금 조성처로 점치고 있는 계열사는 LG홈쇼핑과 LG카드이다. LG홈쇼핑은 2000년 코스닥에 등록되었다. 구본무 LG회장은 홈쇼핑 등록 전에 LG정보통신(LG전자로 합병)이 소유한 홈쇼핑 주식을 주당 4천원 가량에 매수해 등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각했다. 이때 1백50억∼2백억 원의 시세 차익을 거두었는데 이 자금이 비자금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냐고 LG홈쇼핑 관계자가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중수부 중수1과 직원들이 LG홈쇼핑의 전략기획팀·재경팀·전산팀을 압수수색하면서 LG홈쇼핑 등록 전 자료를 집중적으로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LG카드가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의심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카드업계는 2001년 호황일 때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들의 부실 채권을 손실로 털어버렸다. 카드 업계 관계자는 “LG카드가 손실로 털어버린 일부 부실 기업으로부터 회수한 채권액을 회계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비자금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나머지 하나는 카드사의 장·단기 차입 금리 차이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장기 차입은 단기 차입에 비해 금리가 2∼3% 높다. LG카드는 단기 차입을 장기 차입으로 돌려 지급 이자를 과대 계상하고 그 차액으로 비자금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채권 발행 규모가 29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3천억원 가량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혐의에 대해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LG홈쇼핑과 함께 압수 수색을 받은 금호그룹은 바짝 엎드리고 있다. 금호그룹을 상대로 11월17, 19일 압수 수색을 벌인 중수부는 회계 원장과 전산 자료를 ‘싹쓸이’해 갔다. 실무진 4명은 대검 특별조사실로 소환되어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다. 금호타이어는 지난 7월 군인공제회에 매각된 알짜 기업이다. 금호타이어는 연 5천억원 규모인 타이어 원재료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회계 장부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금호타이어가 대선 자금으로 30억원 가량을 제공한 것으로 본다. 또 금호산업은 1997년 11월 한나라당 중앙당사를 신축했으나 건축비 잔금 77억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금호그룹이 이 악성 채무를 못받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LG와 함께 수사 협조에 미온적인 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이 롯데그룹이다. 신동인 롯데호텔 경영관리본부 사장은 지난 10월 말 신격호 그룹 회장에게 현안을 보고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수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급거 귀국했다. 신회장은 홀수 달에는 한국에 체류하는 관행에 따라 11월3일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연기하고 있다. 현재 신사장과 함께 김병일 롯데호텔 사장이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현금 동원력이 업계 최고인 기업답게 롯데가 회사 규모보다 많은 돈을 정치권에 건넨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밖에 한화그룹도 대한생명 인수 과정에서 불거진 비자금 문제가 확대될까 봐 노심 초사하고 있다. 또 강원도 정선 카지노 공사를 맡은 한화건설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9월 중순 제기된 적이 있어 한화그룹 역시 검찰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는 검찰 수사가 기업의 대외 신인도를 떨어뜨리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계가 검찰 수사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다. 재계 입장을 담은 언론들도 ‘재계 공황상태’ ‘대외신인도 하락 우려’ ‘기업 활동 위축’이라고 잇달아 보도하면서 재계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 자금 수사를 총괄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재벌 오너의 지분은 불안해질 수 있지만 회사 투명성은 오히려 높아져 대외 신인도가 올라가지 않겠느냐”라며 수사를 강행할 의지를 밝혔다. 갖가지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이 국민들도 검찰 수사를 지지하고 있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대선 자금 수사는 이제 골조가 올라간 상태이고 다음달부터는 내장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내장 공사가 마무리되는 12월에 대선 자금 지급처와 규모, 처벌 대상과 수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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