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문제 다룬 ‘세계 한민족 포럼’ 지상중계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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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후원, 국내외 통일 논객 초청 ‘세계 한민족 포럼’ 지상 중계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버클리오션 비치 호텔. 한때 뉴요커들의 여름 휴양지로 사랑을 받기도 했다는 이곳은 한동안 찾는 이의 발길이 뜸해 적막감까지 풍기는 지방 소도시의 유서 깊은 호텔이다. 그러나 이 호텔의 적막감은 지난 5월3일과 4일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열띤 토론과 논쟁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졌다. 한민족포럼재단(공동의장 이광규·김일평·이창주 교수, 이사장 안충승 박사)이 국내외 통일 논객과 교포 학자들을 초청해 벌인 ‘제1회 세계 한민족 포럼’이 이곳에서 개최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동북아의 신질서’ ‘21세기 통일 시대를 여는 해외 한민족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로 이틀간 진행된 이번 포럼에는 한국에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필두로 이광규(서울대) 이호재(고려대) 강성윤(동국대) 안병찬(경원대) 김정원(세종대) 배성동(명지대) 박호성(서강대)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와 이종훈 국회입법보좌관이 참석했고, 미국에서 김일평(코네티컷 대학)·신의항(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 김민웅 목사, 독일에서 송두율(뮌스턴 대학) 교수와 조명훈 박사가 참석했다. 러시아·중국·일본의 한민족 문제 전문가들도 가세했다.

<시사저널>은 재외동포재단·KBS·<한국일보> 등과 함께 이 행사의 후원사로서 행사 진행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쟁점 별로 토론 내용을 요약한다.

첫날 오전 섹션으로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과 동북아 신질서’에 대한 토론에서 참석자들의 논쟁이 집중된 주제는 ‘남북 정상회담과 남한의 군사 주권 회복 간의 상관 관계’였다.

오전 토론의 포문을 연 이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였다. 리교수는 약 1시간 10분 걸린 기조 연설에서 남북의 진정한 화해를 가로막는 남한 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냉철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 선악론’(남한은 무조건 선이고 북한은 무조건 악이라고 보는 시각)을 거론하며 그 역사적 뿌리를 파헤쳤다. 유엔 결의 왜곡이 선악론의 뿌리

리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남북 선악론의 발단은 1948년 남한을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한 유엔총회 결의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었다. 당시 유엔총회 결의는 1948년 5·10 선거로 수립된 남한 정부에 대해 ‘삼팔선 이남의 유일 합법 정부’라 인정한 것에 불과했는데, 이를 역대 정권이 삼팔선 이북까지 포함한 한반도 차원으로 확대해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을 국가가 아닌 괴뢰 집단 또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반공 교육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남한 스스로 북한과 화해할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차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 화해 조처의 일환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역시 남한과 동등한 국가’라는 점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리교수는 주장했다.

리교수는 또한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에 대한 남한 지식 사회의 비판에 대해서도 “미국으로부터 군사 주권을 회복해 북한과 동등한 대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자기 반성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라고 질타했다.

북한이 남한을 배제한 채 군사 문제를 미국과 논의하려고 한 근본 원인은 한국전쟁 직후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외국군 사령관에게 넘어가고 영토·영해·영공에 거의 무제한적으로 외국군 주둔이 허용되는 등 남한의 ‘군사적 예속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 문제의 뿌리를 캐 들어가면 항상 정치·군사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경제 문제 위주로만 남북 관계에 접근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맥락에서 6월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사 문제가 제기될 때 과연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리교수는 말했다.

리교수는 또한 남북 간의 군사력 격차가 현격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이산 가족 문제가 인도적 문제인 것처럼 북한에게는 안보 위협 역시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며 서로 신뢰를 쌓으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앞으로 2년간 군사비를 동결하기로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리영희 교수가 주로 정전협정 체제와 분단 전후를 둘러싼 역사 과정에 기초해 남한의 대북 편견과 군사 주권 회복 문제를 역설한 데 비해 발제자로 나선 강성윤 동국대 교수는 ‘동북아 신국제 질서’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강교수에 따르면, 현재의 동북아 질서는 미국 중심의 단일 패권 체제에서 탈패권·다극화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다극 체제로의 전환은 한반도의 분단 체제에도 지각 변동을 초래해 대외적으로는 교차 승인이 완결되고 대내적으로는 공존과 평화의 체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북한 평화협정 체결 및 북·일 수교 움직임 역시 급류를 타게 될 터인데, 이 경우 북한 위협론에 근거한 한·미·일의 전략적 동맹 관계가 재편될 수밖에 없고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21세기 화두는 자주성과 남북공조

또한 지난 50년간 남과 북은 ‘공존 문제’(정치·군사 문제)와 ‘공영 문제’(경제 문제)를 둘러싸고 해석 또는 접근 방법에서 차이를 보여왔는데, 남한이 북한과 대등한 자격에서 공존 문제를 논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유엔사령부의 군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일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강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주변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상 유지 및 분단 고착화로 흐를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21세기 우리 민족의 화두는 자주성과 남북 공조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로 발제의 결론을 맺었다.

리영희 교수와 강성윤 교수가 주로 군사 주권 회복과 남북 문제의 주체적 해결을 강조한 데 비해 안병준 연세대 교수는 ‘남북 정상회담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민족 자결 원칙이 중요하나 주변 강대국의 협력이 필요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며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였다. 특히 안교수는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친미가 아니라 용미(用美) 라는 차원에서 한·미 관계를 잘 활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토론자로 나선 안병찬 교수(경원대)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라”며 직격탄을 날렸고, 미국 현지에서 한반도 문제 평론가로 활동하는 뉴저지 길벗교회의 김민웅 목사도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용미론이 가능했으나 미국이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패권 다툼을 하는 현시기에는 현실성이 희박하다”라고 반론을 폈다. 김목사는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 패권에 이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북한에까지 연장하려 하고 있으므로 다자간 안보 체제를 구축해 미국의 군사 패권을 제약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한 해법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논쟁에 대해 오후 섹션의 발제자로 등장한 이호재 교수는 ‘한반도 통일 과제와 전망’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포괄적인 대북 정책의 기조 속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즉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햇볕정책을 뛰어넘어 ‘전후 유럽을 부흥시킨 마셜 플랜과 같은 북한 경제 개발 정책’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는데, 이런 기조 위에서 동북아의 평화 체제 구축 및 주한미군 문제 등을 종합 검토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교수의 북한판 마셜 플랜은 그가 제시한 ‘5개국 체제 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4강 체제로 이루어져 있는 현재의 동북아 구도는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내재하고 있는데, 동북아에 평화가 정착하려면 4강에 ‘통일 한반도’가 더해진 5개국 체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본격적인 경제 지원뿐 아니라 공동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북한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남한 사회 내부에서의 설득 작업도 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호재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그 일환으로 야당 총재나 야당 의원을 김대통령의 평양 방문 길에 동참시키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교수는 이같이 ‘큰 주제’를 풀기 위해서 주한미군·북한 핵 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당분간 현상 유지 차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 통일의 교훈’을 주제로 한 첫날 오후 섹션은 로널드 마이나르두스 ‘나우만 재단’ 한국 사무소 소장의 기조 연설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남북한은 통일 이전의 동·서독에 비해 인적 교류가 거의 없고 경제력 격차도 훨씬 심해 통일이 되더라도 훨씬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과거 서독의 동방정책과 김대통령의 대북 정책 간의 공통점을 지적한 뒤,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과 같은 흡수 통일은 한반도 통일의 청사진이 될 수 없다’고 밝히고 있으나 독일의 경험에서 볼 때 ‘일단 역사적인 과정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정부가 조절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제한된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과정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통일은 미래의 고향에서 만나는 것

이어 발제에 나선 독일 뮌스터 대학의 송두율 교수는 유럽과 동북아의 조건 차이 때문에 독일 통일의 경험을 남북 통일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즉 독일 통일이 유럽의 통일 과정과 서로 상승 작용을 하면서 이루어졌던 데 비해, 동북아 국가들은 서로 이해 관계가 상충해 한반도가 ‘중심이 갖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전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지구화(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남과 북의 서로 다른 태도 역시 한반도 통일에 장애 요인으로 남아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즉 남한이 지구화에 무비판적으로 편입된 데 비해 북한은 이를 ‘냉전 이후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 중심 체제에 일체화되는 것’으로 보면서 강력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교수는 남북 통일이 ‘50년 전의 고향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못 가 본 미래의 고향에서 남북이 만나는 것’이라며 젊은 세대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땅을 준비한다는 자세로 통일 문제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이어 발제를 맡은 조명훈 박사(함부르크 대학)는 ‘독일 통일과 한국 통일 비교’라는 주제 발표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국내의 시각과 해외의 시각을 아우르는 원근법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남북 통일의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남과 북이 한 지붕 아래 두 살림을 차리는’ 국가연합 단계를 앞당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연방제 통일에 이르는 단계적 방안을 구상했는데, 동독의 갑작스러운 체제 붕괴로 인해 엄청난 통일 비용을 지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가연합 단계를 거치면서 서로 익숙해진 뒤 점차 ‘살림을 하나로 합쳐 가는’ 경로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쨋날 ‘해외 한민족의 과제’에 대한 토론은 첫날에 비해 비교적 차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약 10분간 지정 토론을 위해 장거리 여행을 마다 않고 이곳까지 날아온 모스크바 청년대학의 한 막스 교수와 상하이 복단 대학의 강은국 교수, 일본에서 참석한 최길성(히로시마 대학)·서용달(센 엔드쿠 대학) 교수 등이 재외동포 문제 및 민족 문제에 대해 보여준 열정은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주최측인 한민족포럼재단은 이틀에 걸친 토론 결과를 종합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통일 염원문’과 ‘남북한과 재외동포 사회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한민족 공동체’ 형성에 대한 발의문을 채택하고 이틀에 걸친 열띤 토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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