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선 정국과 푸틴의 미래
  • 모스크바·이건욱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0.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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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 전쟁 고전으로 대권 가도 불투명… 궁지 몰리면 옐친 배반할 가능성
지난해 12월31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갑작스레 사임해 러시아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옐친의 사임은 철저히 계산해 준비된 것이다. 조기 사임은 현재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도우려는 것이다.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 옐친이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저지른 온갖 비리를 자연스레 감출 수 있어, 옐친과 푸틴은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정계와 일반 국민에게 무명 인사였던 푸틴은 누구인가? 1952년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한 그는 국립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들어가 수년간 옛 동독에서 일했으며, 1990년 귀국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 대외협력부장과 부시장을 역임했다. 1995년에는 ‘우리 집-러시아당’의 지구당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96년부터 대통령 정무부장에 임명되어 크렘린의 가신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승승장구했다. 1998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이 되고부터 실세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지난해 8월 옐친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정보기관 출신답게 과묵하며 말을 아끼는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의리 있고 충성심이 강해 옐친의 입맛에 딱 맞는 후임자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는 또한 옛 소련 시절 만들어진 호신술과 유도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도 문외한…유가 내리면 불리

현재 푸틴을 둘러싼 러시아의 정국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푸틴을 여기까지 오게 한 기폭제는 아무래도 체첸에 대한 강력한 군사 대응이다. 하지만 현재 전황은 좋지 않다. 군사 작전 초기의 압도적인 위세가 많이 꺾였고, 연방군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서방 세계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는 터에 만약 연방군의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고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 1차 체첸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은 정부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경제 정책 부문에서 역대 총리 중 가장 문외한으로 평가되는 그가 그나마 유가가 올라 전비를 충당하고 나라 살림을 꾸려 왔지만, 올해 4월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대로 유가가 내린다면 그에게서 매력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푸틴은 1월말 쯤 대통령 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했지만 선거 날짜는 3월26일로 확정되었다.

선거가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푸틴과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와의 2파전이 되리라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공산당과 연합당에 이어 총선에서 3위를 차지한 조국-전러시아연합(OVR)의 전 러시아당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푸틴 지지를 선언했다. 그나마 푸틴의 독주를 막을 유일한 세력인 공산당도 25% 지지율을 더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일단 50% 넘게 국민 지지를 받고 있는 푸틴의 압승을 점치고는 있지만, 과연 다음 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러시아 정국에서 아직 푸틴의 승리를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게다가 3월26일 1차 투표에서 50% 이상 지지를 얻는 후보가 없을 경우 4월16일 최고 득표자 2인에 대한 결선 투표가 실시되는데, 이때 공산당이 3위 득표자와 친 공산당 세력을 묶어 결선 투표에 임한다면 주가노프가 새로운 러시아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전두환·노태우처럼 될 수도

푸틴은 지난 1월3일 옐친의 딸이자 아버지의 이미지 담당 자문역을 맡아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온 타치아나 디야첸코를 해임했다. 타치아나는 크렘린과 관련된 각종 부정 부패의 ‘몸통’으로 알려졌다. 이미 옐친의 면책특권에 관한 포고령에 서명한 푸틴이 타치아나를 제외한 것은 개혁적인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제스처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정적들은 옐친의 안전한 노후를 보장하려는 푸틴의 인기를 깎아내리기 위해 그동안 밝혀졌거나 감추어진 옐친과 그 세력의 비리를 물고늘어질 수 있다. 그러면 푸틴이 옐친을 버릴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가 상관에 대해 남다른 충성심을 갖고 있지만 상황이 자기 쪽에 불리하면 끝까지 옐친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옐친과 푸틴의 관계는 과거 전두환·노태우 씨의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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