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기자의 경찰서 습격 사건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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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던 경찰, 징계 받고 인터넷에 항의 글 올려
7월1일 새벽 4시,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사무실은 한 취객의 행패로 무척 소란스러웠다.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취객은,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사무실 집기를 부수었다. 그가 그렇게 경찰서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동안, 경찰은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한민국 기자’였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대한민국 기자’라고 밝힌 그 취객은 경찰이 수갑을 채울 때까지 30여분 동안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느냐, 기자라고 밝혔는데 왜 신분을 확인하려 하느냐, 대한민국 기자를 뭘로 보느냐”라고 말하며 계속 행패를 부렸다. 그는 수갑을 찬 후에도 계속 거칠게 반항하며, 복사기·팩시밀리·컴퓨터·전화기 등 사무실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수었다. 그가 세 시간 동안 소란을 부리며 입힌 손실은 무려 4백만원어치였으며, 심지어 사무실 바닥에 오줌을 싸기까지 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아침이 되자 그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유유히 경찰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오히려 그의 난동을 말린 경찰들이 징계를 받았다. 그에게 수갑을 채운 남대문 경찰서 김해기 경사(54), 차윤주 경장(34), 조서를 작성한 백해룡 순경(30)은 이틀 후인 7월3일 모두 전보 조처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상식 밖의 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기자와 경찰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행패를 부린 취객은 전날 막 수습 딱지를 뗀 MBC 보도국의 최 아무개 기자(28)로 밝혀졌다). 취재 기자와 경찰 간에 문제가 생길 경우 물을 먹는 쪽은 항상 경찰이었다.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보아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경찰이 상부의 조처에 반발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상황이 반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징계를 받은 김해기 경사는 MBC와 경찰청 사이트 등 여러 사이트에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네티즌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경찰 수뇌부의 비굴한 처신과 기자들의 특권 의식을 꼬집는 글들이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특히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에 김경사의 글이 기사로 실리자, 그 파장은 더욱 커졌다. 기사에 대한 의견만 해도 3백건 넘게 오르는 등 네티즌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존 언론이 다루지 못한, 아니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인터넷 미디어가 보도해서 대안 미디어 기능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네티즌의 비난이 빗발치자 MBC는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MBC는 해당 기자를 전보 조처하고 경찰측에 사과했다.

일선 경찰들의 항의에 시달린 경찰 수뇌부도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특히 경찰 수뇌부가 ‘롯데호텔 노조 파업에 대한 경찰의 음주 진압 보도’에 대해 MBC측에 해명하러 간 자리에서 ‘알아서 기는 식’으로 해당 경찰을 징계하기로 결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일선 경찰의 분노는 폭발했다. 인터넷에 연일 경찰 개혁을 요구하는 일선 경찰들의 의견이 올라오고, 심지어 경찰노조를 만들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세 경찰은 원직 복귀 못해

이렇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MBC와 경찰 수뇌부는 함께 수습에 나섰다. 양측은 해당 경찰관 3명과 MBC 기자가 서로 사과하게 하고, 이런 내용을 알리는 글을 인터넷에 띄움으로써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보 조치를 당한 세 경찰은 원직에 복귀하지 못했다. 경찰 수뇌부만이 이번 사건을 통해서 ‘언론사도 사과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에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자 사회에서도 이 사건을 자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미디어 오늘>에 실리자, MBC 노조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미디어 오늘> 기자가 MBC 노조실에 출입하는 것을 제한했다. 네티즌과 일선 경찰들의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지만 언론계에서 이 사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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