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작ㆍ이영우ㆍ조태완 삼각 커넥션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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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국 오가며 로비스트 활동…국민회의에서도 “시시비비 가리자”
임창렬 경기도지사가 전격 구속된 뒤로 경기은행 퇴출 로비 의혹 사건이 정치권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경기은행 퇴출 관련 진상 조사 특위’를 구성하고 아태재단 관련설과 검찰의 축소 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의혹의 핵심에 김대통령의 장조카인 이영작씨와 아태재단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대통령의 친인척에다 대선 직후까지만 해도 막후 실력자로 알려졌던 이영작씨가 급속하게 의혹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 주변 인사들은 애초부터 검찰이 97년까지 아태재단의 워싱턴 사무국에서 활동했던 이영작씨에게 주목했더라면 수사의 실마리를 훨씬 쉽게 풀 수 있었으리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영우씨 구속 이후 이씨의 실체 논쟁을 거쳐 뒤늦게 언론에 등장한 이영작씨는 이미 정치권에는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영작씨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 통계학 박사 출신이다. 현재 직함은 한양대 석좌교수.

이씨가 김대통령과 맨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이희호 여사의 오빠인 이씨의 부친이 시내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중 당시 야당 총재이던 김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으면서 인연은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을 아는 한 관계자는 “DJ는 이씨의 부친이 박정희 정권의 감시를 피해 가며 야당 총재이던 자신을 돌보아 준 데 대해 그에 대해서는 물론 아들인 이영작씨에 대해서도 심리적 부채를 갖게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영작씨, DJ 당선 이후 구설 잇따라

그러나 정작 김대통령과 이씨와의 본격적 인연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80년대 초 DJ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이씨는 미국 인권문제연구소 운영에 참여하며 현지 안내 역할을 도맡았다. 이 때부터 이영작씨는 유종근 전북도지사 등과 함께 야당 총재인 DJ를 돕는 대표적인 재미 인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이씨는 87년 대선 때부터는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92년 대선 때 그가 내놓은 선거 전략의 적합성 여부를 놓고 그와 국민회의측 인사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97년 대선 직후에는 정치권 일부에서 이영작씨를 안기부 주요 보직에 임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영작씨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전에는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재미 동포들을 상대로 대규모 연회를 열어 또다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국민회의 내부에는 대통령의 가까운 친인척임에도 불구하고 이영작씨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이영작·이영우 커넥션과 관련해 또 다른 관심을 모으는 이는 조태완씨이다. 조씨는 이영작씨의 친구로, 이영우씨를 이씨에게 소개한 인물이다. 조씨의 경력 역시 ‘아태평화재단 미주 지부 이사장’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재무 이사’ ‘미국 민주당 미주리 주 아시안계 위원장’ 등으로 이영우씨만큼이나 다양하다. 결국 서울의 아태재단이 해외 지부 폐쇄 결정을 내린 뒤 이영작씨가 미국에서 별도로 아태재단 미주 지부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이영작씨가 지부장을 맡고 조태완씨가 이사장으로, 이영우씨가 이사로 활동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조씨는 98년 1월 ‘모국 경제 돕기 실천 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상임 대표로 활동했으며, 3개월 뒤인 98년 4월에는 이 단체를 ‘아태재단 미주 지부 부설 한미 경제 외교 협회’로 전환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미경제외교협회에 이영우씨가 또다시 조씨와 함께 공동 회장으로, 이영작씨는 상임 고문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단체는 심벌 마크도 서울의 아태재단과 비슷하게 만들어 아태재단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아래사진 참조). 그러나 아태재단 관계자는 한미경제외교협회 역시 재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세 사람 모두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로비스트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한미경제외교협회가 발행한 홍보 책자에는 공동회장 이영우씨와 조태완씨가 탁월한 로비스트임을 과시하려는 듯 클린턴 대통령이나 조지 미첼 상원 원내총무 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다수 실려 있다. 이 단체 역시 이영우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환태평양 협회’의 총재에 국민회의 중진 한광옥 의원을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동교동계 중진 의원을 고문에 임명해 놓고 있다. 로비스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나름의 장치들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세 사람 때문에 후원회 활동 지장”

이들 세 사람이 아태재단 미주 지부를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단체의 실체에 대해서는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현지 관계자들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97년 대선 때까지 미국내 아태재단의 회원 관리를 도맡았던 전 아태재단 미주 후원회장 이종원씨(대한석유협회장)는 지난 7월24일 <시사저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영우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씨는 “당시 워싱턴에 있는 사무국에서 임의로 임명한 몇몇 ‘이사’들이 각종 단체에 회비를 요구하고 다니는 통에 후원회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영작·이영우·조태원 세 사람은 서울의 아태재단과는 별도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다녔다는 말이 된다.

이영우씨가 이사를 맡고 있다고 주장하는 ‘아태재단 미주 지부’의 본래 명칭은 ‘재단법인 아태평화재단 워싱턴 지부’이다. 그러나 이 단체는 94년 5월부터 98년 초까지만 존재했다. 또 당시 워싱턴 지부의 직원도 지부장인 이영작씨와 현지인 사무원 두 사람뿐이었다.

아태재단 관계자는 “인건비 및 활동비 명목으로 97년 10월까지는 월 7천 달러가 현지로 송금되었으나, 현지에서 물의를 빚자 송금을 중단했고, 4개월 뒤인 98년 1월에는 폐쇄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이영작씨도 출국 직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후원자를 찾기 위해서는 세제 혜택이 필요해 95년 4월 미주 지부만 이사 제도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비영리 법인으로 등록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아태재단 해외 지부 폐쇄 과정에서 ‘대통령의 뜻이 아니다’라며 반발하기도 했었다.

결국 국민회의가 주장하는 아태재단과 이영작씨가 주장하는 아태재단은 양립 가능한 별도 단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제 남은 것은 이영우씨의 실체를 밝히는 검찰의 수사가 아니라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작씨에 대해 ‘정권의 비호’가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본인의 호가 호위였는지를 가려내는 일이 되어 버렸다.

국민회의 일각에서는 이 기회에 아예 이영작씨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친인척임을 내세워 잇달아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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