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의 방북, 미국 ‘한반도 주도권’ 안기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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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성과 함구… ‘협상 주도권 탈환’ 과시
미국 정책 당국이 지난해 북한 정책 조정관이라는 묘한 자리를 신설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매우 절묘한 결정이었다. 윌리엄 페리라는 거물급 인사를 정책 조정관에 임명함으로써 미국 행정부는 의회의 공세로부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북한 정책의 또 다른 당사자인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그리고 언론에 미치는 효과 또한 엄청났다.

페리 조정관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한·미·일의 대북 정책 조정은 비슷한 수준의 실무자급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페리 조정관 출현과 함께 미국의 위상은 갑자기 불가침의 권위를 지닌 것으로 격상되었다. 북한 정책의 모든 초점이 페리 보고서의 향방에 맞춰지게 되었고, 언론의 관심 역시 여기에 모아졌다.

현상만 놓고 보자면 페리 조정관 등장은 지난해 9∼10월에 있었던 미국 행정부와 의회 간의 마찰에서 그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의회와의 갈등이 본격화하기 훨씬 이전에 미국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뭔가 고위급 채널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정책 당국이 94년 갈루치 차관보처럼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협상을 주도할 거물급 채널의 필요성을 느껴오던 차에 의회의 공세를 이용해 이를 관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의회와의 관계는 한국이나 일본이 거물급 조정관 등장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저항감을 무마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명분이 된 측면도 있다.

거물급 조정관을 신설해 미국이 협상 주도권을 탈환한 의미는 이번 페리 방북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 5월25∼28일 북한 방문을 마친 페리 조정관이 첫번째로 방문한 곳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방북 활동의 주내용은 서울에 온 페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워싱턴의 미국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 확인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즉 초미의 관심사였던 김정일 총비서 면담 건에 대해, 페리 조정관이나 서울의 미국대사관이 확인을 거부함에 따라 한국 정부 당국이나 언론은 국무부 대변인 발표를 기다려야 했다.

‘서울發’은 없고 ‘워싱턴發’만 있다

물론 페리 조정관은 지난 5월29일 있었던 한·미·일 고위 정책 협의회에서 방북 활동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론에 알려진 내용은 29일 그가 한남동 외교통상부장관 공관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대상으로 무성의하게 진행한 기자 회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날 기자회견에서 그는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채 자신이 작성한 언론 발표문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자리를 끝냈다. 그가 발표한 언론 발표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북한측 협상 파트너들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으며, 미국과 북한이 기존 협상 채널을 존중하고 앞으로도 유지해 가기로 했다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한·미·일 3국이 서로 협의해 마련한 포괄 협상 방안 중에서 남북 대화나 북·일 수교 교섭에 대해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또한 그가 제시한 여러 현안에 대해 북한측이 어떤 반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미·북한 양자 관계에 국한해 보자면, 페리 조정관의 이번 방북이 미국 행정부에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일단 고무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금창리 조사단의 최근 발표 내용과 함께 미국 의회를 설득할 계기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와 관련한 주요 내용들이 앞으로도 ‘서울발’이 아닌 ‘워싱턴발’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점은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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