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세 감면, 서민에겐 ‘속빈 강정’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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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혜택 쥐꼬리…허점투성이 정책
‘20만원짜리 선물.’ 봉급 생활자 7백만명은 내년 1월 연말정산 때 평균 20만원 정도의 세금(근로소득세)을 덜 내게 된다. 정부와 여당은 총선을 몇달 앞둔 지금 왜 이같은 선물 보따리를 풀려는 것일까.

정부는 6월18일 IMF 체제 이후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중산층 및 서민 생활 안정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대책 발표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고통받고 손해본 사람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경제 개혁에 따른 이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지원 사격을 했다.

인플레 유발·세금 체계 문란 불러

그러나 정작 이 대책의 수혜자인 봉급 생활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무려 백쪽이 넘는 보도 자료를 내고, 관련 부처 장관을 배석시켜 공동 여당 정책위의장이 직접 세금을 깎겠다고 발표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당정이 심혈을 기울인 이 대책에 대해 한 30대 월급 생활자는 “한마디로 내년 총선에 표를 달라는 선심책 아니냐. 달갑지 않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중산층·서민이 아니라 ‘가진 자’를 위한 대책이라고 혹평하는 월급쟁이들도 있다. 정부는 큰 선심(1조4천억원)을 쓴 셈이지만, 막상 중·하위 계층에 돌아오는 몫은 별 것이 없고, 오히려 고소득자일수록 혜택이 크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소득 공제 확대 조처로 연간 1천2백만원을 받는 봉급자는 한 해 1만7천원, 2천만원 봉급자는 3만5천원의 세금이 줄 뿐이다. 세액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반면 6천만원과 1억원인 상류층 소득자는 각각 90만원과 1백20만원을 덜 내게 된다. 이것은 근로소득 공제만 반영했을 때이고, 보험료·의료비·교육비 등을 모두 공제한 경우는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아래 표 참조).

이런 정치적 혹은 형평성 시비를 접어두더라도 이번 대책에는 그 자체의 허점이 적지 않다. 우선 시기 문제. 올해 한국 경제는 과열이 아니냐는 걱정이 나올 만큼 경기 회복세가 빠르다. 연초 2%대로 예측되던 경제성장률은 최근 5∼6%대의 수정 전망치가 나오는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덜 걷히게 될 세금 1조4천억원이 상당수 소비로 이어지고 재정 자금 1조1천억원이 풀리면 인플레 압력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한국은행을 비롯한 경제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실직 등으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지난해에 이런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인플레 최대 피해자인 못 사는 사람들로서는 이번 대책이 ‘되로 받고 말로 주는’ 대책이 될 수도 있다(금융 자산이 많은 고소득층은 인플레가 일어나면 금리가 뛰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세금 체계를 문란하게 만드는 문제도 심각하다. 우선 현재도 근로소득자의 절반 정도가 면세점 이하여서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적게 벌면 적게, 많이 벌면 많이 내게 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운영 원리인 국민 개세(皆稅) 원칙. 정부의 이번 조처로 무과세 계층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직접세인 소득세를 깎아줌으로 해서 가뜩이나 높은 간접세 비중(55%)이 더욱 높아진다는 점도 문제다. 소득 역진 현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정경제부 김진표 세제실장은 “사업 소득자들의 매출액 누락 등이 많아 직접세 비중을 늘리다 보면 상대적으로 봉급 생활자 부담만 높아지는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번 대책이 대증 요법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재정 건전성 확보에 악영향

세금에 대한 봉급 생활자들의 불만은 세 부담이 높다는 것에 있지 않다. 형평성에 있다. ‘유리 지갑’이라는 비유가 있듯이 거의 100% 세원이 노출되는 자기들에 비해 변호사·의사 같은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덜 내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큰 것이다. 최근의 국민연금 논란도 본질은 똑같다. 세금에 대한 뿌리 깊은 형평성 시비가 사회 보험료에도 옮겨붙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우선 손쉬운 공제 확대라는 편법으로 봉급 생활자를 달래려고 든다. 세제 및 세정 개혁이라는 정공법을 피하는 것이다.

재정 적자를 확대시킬 것이라는 점도 이번 대책의 결함이다. 정부는 올해 예상되는 5조원의 재정 수입 증가액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재정 적자를 줄이는 데 쓰고 나머지 절반은 이번 대책에 쏟아부을 작정이다. 현재 경기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조세 수입이 늘고 있는데, 재정경제부는 불과 20여 일 전만 해도 이 여유분을 빚 갚는 데 쓸 생각이었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런 방침을 뒤집어 정책의 일관성을 해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한번 깎아준 세금은 다시 올리기 어렵다. 이번 대책에 포함된 2조원 감세 효과는 거의 영속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뜩이나 구조 조정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부어야 하는 재정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 대책은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한 보고서에서 국가가 경기 부양이나 세제 지원이라는 직접 개입으로는 중산층을 보호하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늘리도록 간접 지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가장 좋은 대책은 일자리 창출이다. 그리고 앞으로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세금 몇푼 깎아주고 교육·주택 자금 융자 정도의 대책으로 힘을 내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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