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양민 학살 전모 밝혀졌다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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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미군측 기밀 문서 추가 입수…‘국군에게 86명 떼죽음’ 확인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진상이 미국 AP통신의 탐사 취재 끝에 드러났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당시 사건 진상 관련 자료를 AP통신의 추적 취재팀이 입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시사저널>은 이미 94년 6월30일자(제244호)를 통해 충북 영동군 노근리 현장을 취재해 `미군의 노근리 학살 사건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시사저널> 외에도 월간 <말>과 <한겨레 신문>이 이 사건을 추적 보도했다. 그러나 근거 자료가 국내에 남아 있지 않고,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점 때문에 국내 언론사가 이 사건을 계속 추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AP통신 보도를 통해 미군 기밀 문서가 공개되고, 당시 미군 관계자들이 증언에 나섬으로써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실로 50년 만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셈이다. <시사저널> 10년 추적, 네 차례 보도

그러나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은 비단 노근리 사건만이 아니다. 이미 김영삼 정권 때 특별법이 제정되어 현재 국무총리실에서 처리중인 거창 양민 학살 사건(51년 2월 발생)은 양민 학살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그밖에도 전국 수많은 지역에서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집단 학살되었다는 호소와 진상 규명 요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동안 노근리 사건이 그랬듯이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라는 이유로 묵살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사저널>은 최근 또 다른 양민 학살에 관련된 미군 당국의 기밀 문서를 입수했다. 공교롭게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AP통신에 보도되기 전날 <시사저널> 편집국에 입수된 미군의 기밀 문서는 한국전쟁 직전(49년 12월24일) 한국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학살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른바 문경 양민 학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 기자는 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보도를 시작한 이래 10년 동안 추적 취재를 해 왔고, <시사저널>을 통해서만도 네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11일자 <시사저널>(제473호)은 당시 미군 극동군총사령부 정보참모부의 기밀 문서 4건을 입수해, 이 사건을 한국군 3사단(사단장 송호성 소장) 25연대(연대장 유희준) 3대대 7중대 2소대(소대장 유진규)가 저질렀음을 최초로 확인 보도했다. 이 사건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 부락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로, 당시 경찰에 협조하고 있던 이 부락 주민 86명이 지나가던 군부대의 오인으로 몰살당한 것이다. 당시 유아 등을 포함해 여자 43명, 남자 43명이 끔찍하게 희생되었다. 물론 사건 직후부터 진상은 은폐되었고, 지금까지도 사망자들의 호적에는 공비들에게 총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생존자들은 유족회(회장 채의진)를 만들고, 김영삼 정부 들어서부터 국회·국방부·청와대·총리실 등에 20여 회에 걸쳐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지난 14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85명이 서명한 특별법 제정 청원서까지 제출되었으나 여야가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람에 자동 폐기되었다.<시사저널>은 지난 10년 동안 이 사건 피해자 유족, 가해 군인, 목격자, 부상자, 사건 현장을 수습한 공무원 등을 연쇄 접촉해 군부대에 의한 양민 학살임을 거듭 확인(제 189·282·473호)했지만 미군 기밀 문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국방 당국이 사건 자체를 부인했다. 지난해 11월 미군의 기밀 문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하자 국방부측이 내놓은 반응은 ‘`국내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국회가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사저널>은 최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는 사건 당시 한국 경찰의 조사 보고서를 포함해,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사건 관련 비망록 등을 추가 입수한 것이다. 노근리 학살 사건이 있기 8개월 전에, 전쟁 시기도 아닌 평화 시기에 자행된 문경 양민 학살 사건 역시 국민의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입수한 기밀 문서를 번역해 공개한다. 증거 1

문서 제목:주한미군 육군 무관이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에게 보낸 1950년 1월11일자, ARMA 10호 전문.

문서 출처: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 시 소재 맥아더 문서관.

수신:극동군총사령부 부관감실 전문 및 전보 센터. 2급 기밀.

발신:한국 서울 주재 미군 무관.

날짜:1950년 1월11일

내용:이하는 한국 경찰 수사 결과 획득된 사건 보고서이다. (49년) 12월24일 12:00께 25연대 3대대 7중대의 2개 소대는 정찰 중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 부락(좌표 1118-1542)에 들어갔다. 군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역했는지를 추궁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자 군대는 도발당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사격을 개시하여,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 포 등으로 민간인들을 몰살했다. 부상만 입은 것으로 판명된 주민들은 소총 사격으로 확인 사살했다. 군대가 살해한 총인원은 젖먹이 3명, 초등학생 9명,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죽은 시체 밑에 누워서 확인 사살을 피했던 부상 남자 5명과 여자 7명은 현재 입원 가료 중이다. 27가구 중 23호의 가옥이 불탔다. 한국군 학살 책임자는 유진규 소위와 하사 2명이다. 중대장은 문경경찰서장과 공모해 군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공비 70명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허위 보고했다. 정황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은 경찰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비밀리에 수사했으며, 파문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수사 결과를 육군에 통보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8명에게 은밀히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군은 사건을 인지했으며 현지에 독자 조사반을 보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해자들은 기소되어 처형될 것이다.

실행: 정보참모부

통보:사령관·참모장·부관참모·대사관 증거 2

문서 제목: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KMAG)의 조사 보고서(문경 양민 학살에 대한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비망록).

문서 출처: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Record Group 338, Entry 11007, Box 69.

문서 제목: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KMAG)의 조사 보고서(문경 양민 학살에 대한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비망록).

문서 출처: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Record Group 338, Entry 11007, Box 69.

조사 내용: 49년 12월25일 한국군 3사단 25연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에 보내왔다. ‘대략 70명의 공비들이 석달 마을을 습격했다. 공비들은 가옥 24호를 태우고 마을 주민 86명을 학살했다’. 이 보고서는 공비들의 전술이 (민간인 학살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에 임시군사고문단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마을에는 가옥이 총 27호 있었고, 주민은 모두 1백39명(남자 77명, 여자 62명)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에 의해 사실상 전멸되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공비들에게 편의와 위문품을 제공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마을은 경찰과 군대의 작전에 두 번이나 조력했다. 1949년 12월23일 16:00시에 한국군 3사단 25연대 7중대의 2소대와 3소대가 각각 점촌과 예천(좌표 1142-1534)을 출발했다. 이들이 받은 명령은 현 주둔지에서 이동해 12월24일 10:00시까지 상선암동에서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연합 부대는 이후 석봉산·달비산·단산에 대한 정찰 활동을 수행했고, 12월24일 18:00시에 갈평리에 도착했다. 석달 부락은 정찰 경로 가운데에 위치했다. 2개 소대는 지정된 시각인 10:00시에 합류했고, 석달 부락으로 이동해 14:00시께 도착했다. 이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백여 명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나서 군은 주민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추궁했다. 주민들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2개 소대는 더 이상의 확인 조처 없이 곧바로 바주카 포·수류탄·소총·카빈총 등으로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다. 무기가 없었던 마을 주민들은 아무런 방어도 못했다. 군대의 공격에 앞서 어떠한 도발도 없었음이 명백하다. 한국군은 다친 마을 주민을 점검해 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 이 잔학 행위에서 2개 소대가 사냥한 숫자는 무방비 상태의 마을 주민 백여명이었다. 부상 남자 5명과 부상 여자 7명은 이웃 주민들의 시체 밑에 죽은 듯이 엎드림으로써 최후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날의 잔학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한국군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진규 소위(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김점동 하사(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안택효 중사(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 7중대장 유응철 대위와 문경경찰서장 이의승 경감은 사건 당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한국군 대위는 경감에게 본부에 허위 보고를 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나서 대위는 자기 상관에게 공비들의 소행이라고 허위로 보고했다. 증거 3

문서 제목: 한국 국립 경찰국 보안과 백한종 경감과 이구락 경위의 문경 양민 학살 사건 조사 보고서.

문서 출처: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서한철 중 37964 파일.

문서 내용:1.보고서 작성자-국립 경찰국 보안과 백한종 경감, 동 이구락 경위

2.장소-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 부락.

3.관련 부대-예천과 점촌에서 온 3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의 한국군.

4.세부 조사 사항-이 마을에는 23가구에 주민 1백39명이 살고 있었는데, 학살 당시에는 방문객 5명(남자 1, 여자 5)을 더해 모두 1백44명(남자 75, 여자 69)이 있었다. 7중대장은 유응철 대위(28)이다. 7중대 1소대는 문경에 주둔하고 있으며 2소대는 점촌에, 3소대는 예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석달 마을을 공격한 부대는 2소대와 3소대이다. 2소대 지휘관은 안택효 중사(28)이고, 그의 소대에는 32명의 병사가 있었다. 3소대 지휘관은 유진규 소위(23)로서 그의 휘하에는 35명의 병사가 있었다. 이들은 M1소총·유탄 발사기·수류탄·총검으로 주민을 학살했다. 학살은 49년 12월24일 13:00시부터 14:00시까지 이루어졌다. 공격하는 와중에 가옥 23채와 내부의 모든 가구가 불탔으며 1백44명 중 민간인 남자 43명과 여자 43명이 살해되었고, 민간인 남자 5명과 여자 7명이 다쳤다. 문경경찰서 정보과에서 파견된 형사 황영훈은 7중대장과 함께 있었는데, 소대 지휘관이 중대장에게 수상한 마을을 공격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으며, 이 보고를 받고 중대장이 소대 지휘관에게 매우 화를 냈다고 말했다. 황형사는 문경경찰서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다음날 한국 국립 경찰은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은 뒤 시체들을 가매장했다. 그때까지 다친 여자 3명과 어린이 2명이 시체더미에 생존해 있었다. 경찰은 부상자들을 김천도립병원과 점촌병원으로 후송했다. 중대장은 자신이 학살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단지 2개 소대에 12월24일까지 정찰 임무만 마친 뒤 17:00시에서 18:00시 사이에 귀대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상의 조사 내용은 군대를 현장으로 인도했던 민간인 2명과 부상자들, 황형사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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