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정부에게 항복한 것일까?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9.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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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시간끌기 전략’ 간파… 일부 재벌 총수 고자세도 ‘강공’ 부채질
6공 이후 본격화한 정부와 5대 재벌 간의 긴장 관계를 게임으로만 본다면, 거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재벌은 겉으로는 구조 조정을 종용하는 정부의 요구에 맞추어 몇 가지 계획을 공표한다. 하지만 속셈은 시간 벌기.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 보면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이 정치 쟁점에 휩쓸리거나 힘을 잃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보여온 재벌의 게임 논리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라는 비상 시국이지만, 이번에도 양상은 비슷해지는 듯했다. 5대 재벌이 정부에 각종 구조 조정을 약속했지만 좀처럼 지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4월14일 김대중 대통령이 5대 재벌을 압박하는 발언을 한 이후 벌어진 상황은 그런 예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5대 재벌,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대우그룹과 현대그룹이 당장 정부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자금 악화설까지 겹친 대우그룹의 경우는, 19일 해외 출장 중이던 김우중 회장이 급히 귀국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그룹의 핵심 사업인 대우중공업 조선 부문을 매각하는 것을 포함해 획기적인 재무 구조 개선 계획을 발표했다. 대우그룹은 김회장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도 올해 안에 26개 계열사와 금융 자산을 매각하고, 외자를 유치해 빚 29조원을 갚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재벌의 ‘기’는 일단 꺾었으나…

현대그룹 역시 기아 계열사 13개를 1개로 정리하는 등 계열사 매각과 유상 증자를 통해 빚 9조원을 갚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막판까지 진통을 거듭해 온 LG그룹과의 반도체 분야 빅딜도 급진전시키고 있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17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만난 데 이어 19일에는 이위원장·구본무 LG그룹 회장과 3자 회동을 통해 LG반도체 가격을 둘러싼 견해 차를 좁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게임의 법칙이 깨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대통령을 포함해 재벌 개혁을 주도하는 경제 부처 각료들이 재벌의 시간 벌기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김대통령은 지난해 12월7일 정·재계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5대 재벌 총수를 불러 구체적인 구조 조정안에 합의하게 했다. 국민 앞에서 빼도 박도 못하도록 언약식을 하게 한 것이다.

그때 한 약속에 따라 올해 2월10일에는 지난해의 약속 이행 실적을 평가했다. 대우·현대 두 그룹이 문제가 된 것은 4월16일 열린 1/4분기 실적 평가 때였다. 여기서 두 그룹은 각각 경고와 이행 권고 조처를 당했다. 한 달 이내에 확실히 재무 구조 개선 작업을 하지 않을 경우 새로 대출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정부와 채권 금융기관은 4월22일 또 한 차례 두 그룹의 계획을 검토할 계획이다. 26일에는 한 차례 연기되었던 김대통령과 5대 재벌 그룹 총수 간의 정·재계 간담회도 예정되어 있다. 재벌들이 빠져나갈 길을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상황을 자초한 것은 5대 재벌, 그 가운데서도 이번에 문제가 된 대우·현대 그룹 총수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우 김우중 회장의 경우는 지난 2월 이후 김대통령을 포함해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 이헌재 금감위원장 등을 잇달아 접촉하는 과정에서 종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려는 모습을 보였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대우가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믿고 (정부에)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대우에 비교적 호의적이던 정부내 세력까지 위축시켜 정부의 태도를 강경 일변도로 치닫게 했다. 대우의 자금 악화설이 돌기 시작하던 2월께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대우그룹의 핵심 계열사 가운데 3개 정도만을 남겨두는 획기적인 구조 조정 방안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김회장의 기자회견으로 이 방안은 사실상 현실화했다). 그리고 4월14일 드디어 김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청와대 출입 기자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의 경우라 하더라도 6∼30대 재벌의 구조 조정 방안으로 도입된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을 도입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다. 5대 그룹 중에서 문제가 되는 그룹이 2개 있다는 강봉균 수석의 발언이 곧 이어졌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16일 경영권에 변동이 없는 워크아웃을 ‘저주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오른쪽 딸린 기사 참조)을 감안해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 경영권을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의 5대 그룹 부당 내부 거래 조사설도 흘러나왔다.

재벌의 목을 죄는 이 전략은 정부로서도 위험 부담이 꽤 컸다. 5대 재벌 계열사 워크아웃 사실이 공표되면 안정세를 찾은 금융권이나 급등세를 타는 증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이 “대우와 현대가 워크아웃이나 금융 제제 대상이 된다는 보도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슬쩍 발을 뺀 것은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우·현대 그룹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진전된 재무 구조 개선 계획을 발표했으므로 정부와 재벌의 게임에서 정부가 완승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벌 개혁이라는 이름의 게임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의 목표가 단순히 재벌의 ‘기’를 제압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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