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급류 타는 ‘빅딜’ 막힌 곳은 없는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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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재벌 총수들 만나 ‘끝내기’ 박차…후유증 우려 높아
지난 1월22일 낮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만났다. 당초 예정에는 없던 만남이었다. 이 단독 면담의 성격을 그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라면, 그보다 이틀 전에 있었던 경제 부처 장관들의 비공식 회동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주로 빅딜(대규모 업종 맞교환)이 지지부진한 것을 크게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대통령과 이회장의 면담 결과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김대통령이 빅딜을 조속히 마무리하라고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했으리라는 추측만 무성했다. 면담이 있기 하루 전인 21일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이 전격적으로 만났다. 이 역시 20일 경제 장관들의 회동과 관련이 있다고 추론될 따름이었다.

김대통령과 이회장의 면담이 열리던 날 비슷한 시각, 서울역 광장에서는 삼성자동차 임직원 4천여 명이 참여한 빅딜 반대 시위의 열기가 드셌다. 시위를 주도한 삼성자동차 확대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이재경)는 ‘밀실 빅딜 논의를 중단하고 노동자와의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까만 리본을 두른 SM5를 앞세운 시위대는 대우그룹 본사 앞을 거쳐 명동까지 행진했다.

삼성자동차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빅딜 대상 기업인 대우전자와 LG반도체 역시 수시로 빅딜 반대 시위를 벌이며 조업 중단을 계속해 오고 있다.
빅딜 논의, 대통령 대 노동자 구도로

빅딜 논의가 점차 대통령 대 노동자의 구도로 좁혀지는 양상이다. 물론 재벌 총수와 그룹이 중간에 끼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양쪽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과 노동자가 맞선 형국이라는 얘기는, 말을 바꾸면 현재 진행 중인 빅딜 논의에 경제 논리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뜻이 된다. 빅딜 작업에 간여해 온 국책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이제 김대통령은 빅딜 논의에서 발을 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후유증이 생기는 것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12월7일 해당 그룹이 빅딜에 합의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당시 무성한 빅딜 논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김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합의를 강제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이제 다시 빅딜 마무리 작업에 나선 것도 지금의 국면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기 위해서다. 빅딜을 기업 당사자들에게 맡겨둘 경우 차일피일 시간만 보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그렇잖아도 빅딜 대상 기업들은 내심 못마땅하게 여겨 왔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 빅딜을 예로 들어 보자. 우선 두 회사의 입장 차가 상당히 크다. 삼성은 ‘경영권 양도 후 실사’를 주장하지만 대우는 정반대이다. 빅딜 대상을 놓고도 부딪치고 있다. 삼성은 상용차 부문을 포함해 삼성그룹 내의 모든 자동차사업 부문을 교환하자고 고집하는 반면 대우는 삼성자동차만 빅딜 대상으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다 SM5 차종을 계속 생산하는 문제라든가 대우전자 임직원 고용 승계 문제 등 걸려 있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통합 문제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어렵다. 두 기업의 태도는 빅딜을 성사시키겠다기보다는 결렬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LG그룹은 LG반도체 임직원의 고용을 5∼7년 동안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현대는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빅딜 마무리 작업에 직접 나서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문제가 정치 쟁점화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영남권 장외 집회를 계속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빅딜 논의를 줄곧 ‘영남 기업 죽이기’로 몰아붙여 왔다. 영남 지역에서 이런 논리가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1월24일 한나라당의 마산 집회에서 이 지역 출신 김호일 의원은 “삼성은 의령이 고향인 이병철씨가, LG는 진주 구씨가 세운 기업이다. 어떻게 골라도 이렇게 경남 기업만 죽일 수 있느냐”라고 말해 환호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서둘러서 빅딜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크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여권의 판단이다.

재계에서는 이번의 연쇄 회동을 계기로 빅딜 작업이 급류를 탈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은 조만간 2차 회동을 할 예정이다. 1차 회동 직후인 22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은 이를 직접 공언하기도 했다. “(21일 쟁점 사항에 대해 협의했던) 두 그룹 총수가 곧 다시 만나 쟁점 사항을 정리할 계획인 것으로 안다.”

이렇게 되면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통합 작업도 급진전할 가능성이 높다. 두 회사가 유·무언의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회동도 불가피해진다. 이건희 회장에 이어 김대통령과 단독으로 면담했던 김우중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구본무 회장을 만나, 정부의 뜻을 전달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경제적 효과 기대 난망?

빅딜이 순조롭게 풀려 간다 해도, 경제 관점에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당초 기대했던 경제적 효과를 거두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빅딜의 최대 걸림돌은 생산과 고용 문제. 빅딜을 둘러싼 논란을 서둘러 봉합하려면 정부나 기업의 처지에서는 노동자들이나 지역 주민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빅딜을 통해 과잉 설비와 인력을 조정하려던 정부의 계산은 빗나가게 된다. 경제 전문가들의 비난도 피할 길이 없다. 쟈딘플레밍 증권 서울지점 스티브 마빈 이사는 최근 한 세미나에 참석해 ‘빅딜이 현재와 같이 진행되는 한 당초 기대했던 효과를 결코 가져올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비하면, 빅딜이 잘못되었을 경우 비난의 화살이 대통령에게 직접 쏟아질 것이라든가,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되는 경제 정책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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