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존심, 치미는 분노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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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국정 실패·김현철 농단 의혹에 감정 폭발… 지역 경제 망가져 더욱 악화
‘니YS 찍었제?’ ‘어데, 내는 안찍었는데….’ ‘그게 참말이가? 내도 안찍었는데, 그라믄 YS가 우째 대통령이 됐제?’ 요즘 부산 지역 술집에서 나도는 대화 형식의 우스갯소리 가운데 하나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 폭락을 풍자한 이야기는 또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서울 사람이 부산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 부산 출신이지요?’부산 사람이 대답한다. ‘맞는데, 그런 거는 와 묻소?’ 서울 사람이 다시 말한다. ‘그러면 YS를 제발 좀 데려가 주시오.’ 말문이 막힌 부산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뜬다.

30년 동안 김영삼 대통령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온 부산 시민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연말의 노동법·안기부법안 날치기 처리와 한보 사태에 이어 최근 차남 김현철씨의 국정 농단 의혹까지 터져 연일 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으면서 ‘문민 대통령’에 대한 초기의 자부심과 기대는, 중반의 실망과 동정을 거쳐 집권 말기에 이르러 분노와 배신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 지역에서 손꼽히는 중견 제조업체를 운영하다가 지난해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해 부도를 내고 쓰러진 허 아무개씨는 “각종 규제 법규로 그물을 쳐놓고 기업인들의 숨통을 죈 것이야말로 YS의 최대 실책이다”라고 지적한다. 부산시 구서동에서 입시학원을 경영하는 박 아무개 원장은 “온천장에 있는 유흥업소 주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최근 가게를 내놨다는 소문이 떠돈다. 부산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부산 경제를 망쳐놓았다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박원장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올해만 해도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한보철강·대동조선·삼미특수강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한보·삼미 그룹의 부도 여파로 쓰러졌다. 부산 사상공단에 입주했던 생산업체들이 설비를 챙겨 다른 지역이나 외국으로 나가는 일도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는다는 얘기다. 이런 탓인지 한때 4백30만에 가깝던 부산 인구는 최근 4백만을 밑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공무원·시민·지식인·기업인 등 각자 위치에 따라 대통령을 비판하는 각도는 제각각이지만 결론은 한결같다. ‘잘한 일도 없이 자존심만 갖고 국정에 임하다가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대통령 자존심의 원천은 일찍부터 거론되어온 ‘무지와 독선.’ 아버지조차 자세히 모르게 진행된 차남 현철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그의 무지에 대한 동정론이 고개를 들 법하지만 시민들 반응은 쌀쌀하다. 허평길 교수(부산대·일반사회교육과)는 “작년까지는 적게나마 동정론과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 대형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아예 종적을 감췄다. 현철씨 문제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최종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라고 전한다.

대통령 책임론의‘최고 수위’는 곧 하야를 말한다. 부산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은 이미 3월24일부터 김영삼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단식 농성에 들어간 데 이어, 3월27일 역시 같은 목적으로 학생총회를 열었다. 이 대학이 학생총회를 열기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이다.

“YS 배출해 불이익만 당했다”

하야론이‘과격한’ 대학생들에게서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경남매일신문〉의 한 중견 기자는 “7·8월 대통령 하야설이 빠른 속도로 유포되면서 논쟁이 벌어지는 사례도 종종 목격된다. 논쟁의 결론은‘하야 불가’ 쪽으로 기울지만, 그것은 결코 김대통령이 고와서가 아니다. 임기 만료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더욱이 정당 정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한국 정치 상황에서 대통령이 하야한다면 그야말로 나라의 장래가 위험해진다는 우국충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부산 시민들의‘반YS 정서’에는 30년 공들여 키운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도 짙게 깔려 있다. 대구 위천공단 결정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대통령을 배출한 이 지역이‘받는 것도 없이’ 상대적 불이익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존심도 무너지고 국정 실패 책임을 대통령과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부산 시민들. 그들은‘YS를 책임지라’는 뼈 있는 농담을 되씹으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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