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밀월’ 쌀이 중매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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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중순 북경서 비밀 ‘원조 협상’…일본내 반대 여론·한국 반발이 걸림돌
지난 1월 6일 일본 <산케이 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죽기 전 ‘북·일 수교 교섭은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일본재단 이사장 사사카와 요헤이(笹川陽平)씨를 92년 3월 접견하면서 김일성은 “일본의 집권당(자민당)과 최대 야당(사회당)이 조선노동당과 합의한 사항이어서 (수교 교섭) 실현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 결정 과정을 너무 몰랐다. 외교적 지식이 부족했다”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92년 11월 북경에서 열린 8차 회담을 끝으로 북한과 일본은 수교 교섭을 중단했다. 김일성이 후회한 대로 북한은 일본의 정치 구조를, 일본은 북한의 속내를 잘못 판단한 때문이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치며 4년간 끌어온 북·일 관계는 최근 불거진 제3차 쌀 원조 문제를 계기로 다시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작년 12월 중순 북경에서 네번째 북·일 비밀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외무성 벳쇼 고로(別所浩郞) 북동아시아과장과 북한 외교부 이철진 일본과장이 참석한 이 비밀 접촉에서 북한측은, 금년도 식량 부족분이 2백50만 t이라며 일본측에 세번째 쌀 원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이같은 물밑 접촉을 거쳐 제3차 쌀 원조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오는 25일 벳푸(別府)에서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의제로 삼자고 한국에 요구해 왔다.

일본 “50만t 정도는 원조 가능”

일본측의 제3차 쌀 원조량·시기 등에 대해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1차가 30만t(유상 15만t, 무상 15만t) 2차가 20만t(전량 유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게는 20만t, 많게는 50만t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인다.

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는 그 근거로 북한이 처음부터 백만t을 요청했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작년 5월 일본을 방문한 북한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이성록 위원장은 당시 연립 여당 관계자들에게 북한의 궁핍함을 설명하면서 쌀 백만t 원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록은 그 근거로 싱가포르 비밀 접촉에서 일본측이 ‘외국산 잉여 쌀 재고가 84만t 남아 있으니 백만t 정도 원조는 가능하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잠수함 사건 해결 후 북한이 4자 설명회 참석 의사를 밝힘에 따라 1년 전의 3차 쌀 원조 약속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최근의 풍작으로 정부 재고미가 수백만t에 이르고 있어 50만t 정도 원조는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 정부는 쌀 원조를 미끼로 북한을 수교 교섭 테이블에 끌어들인다는 속셈이다. 수교 교섭이 본격 재개되지 않더라도 일본 정부는 북송된 일본인 처 일시 귀국, 93년 11월에 정지된 북·일 민간어업협정 재개 문제 등 현안을 타개하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의 의도대로 3차 쌀 지원 문제가 일사 천리로 타결될지는 알 수 없다. 우선 한·미·일 공조 체제를 벗어나 일본이 단독으로 쌀을 지원할 경우 한국 정부의 반발을 면키 어렵다. 지금까지 일본이 북한에 제공한 쌀 50만t은 한국이 제공한 15만t의 3배를 넘는 양이다. 또다시 일본이 한국 정부의 양해 없이 쌀을 대량 지원할 경우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이다.

일본 국내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1차 쌀 지원 후 ‘일본의 쌀은 사죄 의미로 헌납 받은 것이다’라는 김용순 서기의 발언이 전해지면서 일본 여론이 악화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김용순이 그후 두 차례에 걸친 해명 편지를 보내 2차 원조가 실현된 바 있다.

또한 1차, 2차 때의 50만t 원조는 수요가 전혀 없는 외국산 쌀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론의 반발이 없었다. 그러나 2중곡가제에 의해 시가보다 비싸게 사들인 일본 국내 쌀을 대량으로 지원할 경우 ‘세금 낭비’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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