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도 대선 자금의 철퇴 맞을까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롯데 등 1~2명 위험, LG·한화는 여유…이건희 회장은 사법 처리 면할 듯
불법 대선 자금과 관련해 재벌 총수가 사법 처리되는 일이 벌어질까. 검찰이 재벌 총수까지 사법 처리할 수 있음을 처음 언급한 것은 2월14일. 공교롭게도 이 날 노무현 대통령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의 취임 1주년 특별 대담을 갖고 기업인에 대해 직접적인 처벌이 진행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알려진 것은 인터뷰가 실린 중앙일보 2월16일자. 기업인이 노무현 후보 캠프에 준 돈이 드러나지 않은 데 대해 가뜩이나 야당의 공세가 가열된 시점이었던 데다가, 대통령을 만난 사람이 홍회장이었다는 점에서 노대통령의 발언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홍회장이 삼성 이건희 회장과 특수 관계이고, 재계는 기업인 사법 처리 강도와 관련해 삼성을 기준점으로 지목해 왔기 때문이다.

일선 수사팀의 기류도 심상치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통령과 홍회장의 대담 내용이 일선 수사팀을 격앙시켰다”라고 귀띔했다. 이 때부터 수사팀 내에서 최고위층까지 빠짐없이 사법 처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검찰 수뇌부가 일선 수사팀의 반발을 수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한두 명의 총수가 사법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이 자수·자복했는지 여부, 비자금 조성 규모와 과정, 범행 은폐 여부와 개전의 정이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사법 처리는 롯데그룹이 우선 대상이 된다. 검찰이 수사에 가장 비협조적인 기업으로 찍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네 차례, 공개적으로도 두 번이나 압수 수색을 벌였지만, 검찰만 ‘망신’을 당한 격이 되었다. 비자금 조성처로 알려진 롯데건설 임승남 사장은 2월18∼19일께 소환을 앞두고 17일 돌연 입원해 버렸다. 신격호 회장의 차남이자 한국롯데 최고 책임자인 신동빈 부회장은 사실상 검찰이 최후 통첩을 보낸 2월20일 오후 2시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신격호 회장은 수사 초기부터 자신의 국적이 일본임을 들어 경영진에게 검찰에 관련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신회장은 신동빈 부회장과 함께 당분간 귀국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2월23일 신회장 부자의 출두 거부에 대해 “안 들어오면 정식 법적 절차를 취하겠다”라고 강경 방침을 밝혔다. 안부장은 이미 신부회장이 비자금 조성 건을 알고 있었다고 밝혀 사법 처리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치권에 제공한 불법 자금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비자금 규모가 크고 죄질이 나쁘다면 총수도 사법 처리 대상이 된다는 안중수부장의 최근 발언이 롯데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했다. 롯데는 한나라당 신경식 의원에게 불법 자금 10억원을 제공한 것 외에는 아직까지 드러난 것이 없지만, 1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기업인 사법 처리와 관련해 최대 관심 기업은 삼성이다. 정치권에 불법 자금을 가장 많이 제공했고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성은 지금까지 3백72억원을 한나라당에 제공했다. 삼성은 수사 초기에 현금 40억원과 채권 1백12억원만 주었다고 진술했고 채권 번호를 알려 달라는 검찰의 요구에도 미온적이었다. 삼성이 채권 1백70억원을 한나라당에 더 제공한 사실을 밝혀낸 것은 검찰이 사채 시장을 뒤진 덕분이다. 검찰은 한 달이 넘게 사채 시장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사채 업자 수백 명을 조사했다고 한 사채 시장 인사는 귀띔했다.

삼성이 협조한 기업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검찰 내에서도 오락가락했다. 2월16일 삼성을 협조 기업으로 분류했던 안중수부장은 진의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자 다음날 ‘그 쪽(삼성)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다음날 송광수 검찰총장도 삼성이 협조한 기업인지 여부는 앞으로 얼마나 협조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삼성을 봐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 시각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김인주 사장이 당초 소환 일자를 하루 늦추어 2월18일 출두한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불법 대선자금 전달자인 김인주 구조본 사장의 소환 결과에 대해 안중수부장은 ‘의미 있는 진술은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 날 밤 10시께 김사장을 돌려보내며 이학수 부회장(구조조정본부장)의 조기 귀국을 촉구했다. 검찰로부터 김사장에게 대선자금 전달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부회장은 1월28일 미국으로 출국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이학수 부회장은 구속하고 이건희 회장은 포토 라인에는 세운다’는 삼성 처리안이 나돈다. 영장 청구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이회장을 공개 소환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검찰 조사를 받은 총수는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다. 안중수부장은 이들이 다시 조사받을 수 있으며 사법 처리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선별적 형사 처벌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경영자에 대해서는 소환 일정조차 잡혀 있지 않는 등 수사가 중단되어 있다. 검찰은 100억원의 불법 자금이 고 정주영 명예회장 돈이라는 주장을 문제 삼고 있다. 현대가 돈의 출처를 얼마나 정직하게 밝히느냐에 따라 사법 처리 수준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아직 검찰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반면 LG는 한결 느긋하다. 1백50억원의 자금 제공에 대해 강유식 부회장이 책임질 가능성이 높지만, 더 밝힐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검찰이 대주주 갹출금이라는 LG의 소명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1월1일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의혹을 받는 김승연 한화 회장도 검찰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총수 가운데 유일하게 직접 자금을 제공했지만, 서청원 의원과 이재정 의원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팩스 등을 통해 알려오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기업 사법 처리의 최대 분수령은 해외 체류 등으로 소환에 불응하고 있는 롯데와 삼성 관계자들이 포토 라인에 세워지는 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수사에 차질을 빚고 있지만 늦어도 3월 중순까지는 기업인 처리를 일단락할 계획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