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야당의 흠집 내기에 ‘대폭발’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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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생산→여권 확대 재생산에 쐐기 박아…대권 전략 맞물려 재대결 가능성
오랜 법조 생활 때문일까. 이회창 신한국당 상임 고문의 말에는 군더더기나 흥분이 끼여들 틈이 없다. 필요한 말만 간명하게 추려서, 차분하게 전개하는 것이 그의 화법이다. 그런 이고문이 극도로 격앙된 말을 내쏟아 정가의 관심을 한몸에 모았다.

11월27일 강원대 강연에서 행한 ‘더러운 정쟁’ 발언이 그것이다. 그는 이 날 강연에서 “과거의 정치는 낡고 구태의연한 정치였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풍토와 방식이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횡행했다. 이런 과거의 더러운 정치 풍토는 더러운 정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정치적 검증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도착적인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고문은 기성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한 듯한 ‘더러운 정쟁’ 발언이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자, 11월29일 재반격에 나서 공격의 초점을 야당에 맞추었음을 분명히했다.

이고문은 왜 춘천 발언을 통해 평소와 달리 격한 표현을 구사했을까. 왜 재반격을 통해 당초 공격 대상이 야당이었음을 못박은 것일까. 여기에는 그동안 여러 차례 오갔던 야당과의 신경전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다.

사실 이 사건을 먼저 도발한 쪽은 국민회의였다. 이고문이 김대통령과 갈등 끝에 총리 직에서 물러난 뒤부터 줄곧 그에게 호감을 보여온 국민회의였다. 그러나 그가 정치권에 합류하고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감으로 부각되자, 국민회의측은 그를 주 공격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국민회의는 지난 11월 초 당보 〈새정치뉴스〉(제17호·11월5~20일자)를 통해 신한국당 대권주자 아들들의 병역 기피 의혹을 크게 다루면서, 이고문을 기사 첫머리에 올렸다. 이 기사는 ‘법대로 정치인이 이럴 수 있나’ 라는 제목 아래 ‘확인 결과 둘째 아들은 90년 신체 검사 때 제2 국민역에 편입되었으며, 여전히 장남의 병력은 오리무중임. 깨끗한 정치인, 법대로 하는 정치인이 왜 자기가 아들의 병역 사항은 밝히지 못하는지…’라며 이고문을 꼬집었다.

이즈음 이고문에 대한 갖가지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가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부친이 친일파로 창씨 개명에 앞장섰고 집에서도 일본말만 썼다’ ‘첩과의 사이에 난 딸을 숨겨 두었다’ ‘대법관이 되기 위해 당시 실세이던 P씨를 세번이나 찾아가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 면담했다’ ‘5·16 때 소장 판사들이 거리 선언을 했는데 그때 선언문을 작성했다’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민주화 투쟁을 거치지 않은 전형적인 무임승차형 인물’ ‘대쪽 이미지로 포장된 기회주의적 인물’이라는 비판론도 공공연히 제기되었다.“근거 없는 과거 들춰내기”

이고문 쪽은 소문 진원지와 유통 경로를 추적하고 ‘국민회의 생산→언론계 중간 유통→신한국당 일각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즉 국민회의 쪽에서 이고문의 과거사와 관련해 의혹거리를 만들어내면, 야당 출입 기자들이 여권 기자들에게 전하고, 여권의 일부 대권 주자 진영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순서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는 것이 이고문 쪽의 상황 인식이다. 이고문 진영은 ‘이회창 흠집 내기’를 통해 반사 이익을 얻게 되는 집단을 괴소문의 진원지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고문으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한 결정판은 국민회의의 뉴스레터 〈새정치소식〉 11월26일자였다. 여권 대권 주자들을 해부하는 ‘포장지를 벗겨보자’는 시리즈물 기사에서 이회창 고문은 ‘호시탐탐형’ 인물로 분류되면서 맨 첫머리에 올랐다. 이 기사는 이고문을 적시해서 ‘절대로 정치하지 않겠다. 입당하는 일이 있으면 이혼하겠다’고 했지만, YS가 큰 떡을 제시하자 하루아침에 표변한 과대 포장의 대표적 인물’ ‘총리 재임시 관변 단체 지원 중단을 최대 업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신한국당의 관변 단체 지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 주는 인물’ ‘이홍구 대표와 함께 계속 포장만 되어 왔지 한번도 검증 받은 바 없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공개 문건을 통한 국민회의의 연타 공격은 이고문에게 ‘더러운 정쟁’이라는 강공을 택하게 만들었다. 이 날 강원대 강연 원고는 측근들조차 사전에 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이회창 흠집 내기 기류와 이고문의 상황 인식을 감안할 때, 이고문은 강원대 폭격을 통해 이고문 공격의 선봉에 서온 국민회의와 이를 은근히 즐겨온 여권 일각을 동시에 겨냥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어쨌든 이고문의 강원대 발언은 즉각 국민회의의 반격으로 이어졌고, 이고문은 11월29일 송파 병 개편대회 치사를 통해 재반격에 나섰다. 국민회의는 ‘이회창 의원은 5,6공 치하에서 대법관으로 참여해서 영달을 누렸다. 그의 더러운 정쟁 발언은 민주화 투쟁을 한 야당 인사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맹공했다. 그러나 이의원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서 “5,6공 시기에 대법관으로 일한 것을 지금도 떳떳하게 생각한다. 정권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한 것이다. 내가 말한 더러운 정쟁은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 정치를 가리킨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이고문과 국민회의 간의 치열한 공방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는 양쪽이 서로 공격을 자제하기로 함으로써 일단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야의 대권 전략과 현재의 정치 지형에 비추어 볼 때 국민회의와 이고문 사이에는 앞으로 제2, 제3의 전쟁이 벌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국민회의의 대선 필승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축, 즉 DJP 후보 단일화와 여권의 내부 분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회의는 특히 여권의 내부 분열이 이고문을 중심으로 일어날 때, 그 파열음과 국민에게 미칠 영향력이 가장 크리라고 내다본다. 여권 내부에서 대형 비리가 터질 때마다 국민회의가 ‘대쪽 총리는 지금 과연 무엇을 하는가’라고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고문측은 국민회의의 이런 공세를, 가장 강력한 차기 주자 중의 한 사람인 이고문에게 미리 흠집을 내고, 이고문의 자존심을 건드려 여당 내분을 유도하려는 양면 전략이라고 본다. 따라서 국민회의가 싸움을 붙이는 데 말려드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고문측의 판단이다.

이고문은 지난 11월30일 오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이런 인식을 분명히 밝혔다.
‘더러운 정쟁’ 발언을 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평소 화법에 비해 표현이 너무 격해서 우발적인 발언이라는 관측도 있는데….

누가 우발적이라고 하던가(못마땅한 듯 두번이나 되물었다). 원래 정치권에 들어와서부터 주장해온 깨끗한 정치, 품위 있는 정치, 그런 정치에 대한 기대를 기조로 한 발언이다. 이 부분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안하는 게 좋겠다. 말꼬리 잡아 다투는 것처럼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5, 6공 때 대법관을 지낸 이고문의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한마디로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 문제나 안기부법·노동법 개정 등 현안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야당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회피론은 야당적인 시각이다. 법조계에 있을 때 소신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정치권에 와서도 재판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건 매우 불합리한 요구다. 물론 소신과 원칙의 기조는 지켜야 하고 지킬 것이다. 그러나 행동 패턴을 자꾸 좁혀서 어느 한쪽으로 화석화해서 평가하고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비판은 바깥에서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어쨌든 이고문은 이번 싸움을 통해 자신을 향해 음양으로 전개되는 공격의 예봉을 꺾고, 자신을 제1 야당과 같은 위치에 올려 놓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고문은 이번 공방전을 통해 그토록 자신이 비켜 가려고 했던 더러운 정쟁에 서서히 휘말리기 시작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컴퓨터 통신망에는 ‘이고문 당신마저도…’라는 비판의 글이 올랐다.

더욱이 이고문은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들춰내는 더러운 정쟁의 초입에 섰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이 정쟁의 한복판을 품위 있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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