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와 미군, `키르쿠크의 약속` 누가 깼나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4.03.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키르쿠크에 군대 잔류 원해…한국군 ‘점령군 총알받이’ 될 위험 커
“미군은 원칙을 중시한다. 그래서 단 두 달을 주둔하더라도 일정에 맞게 병력을 교체하려는 것이다.” 지난 2월16일 국방부 관계자가 기자에게 답한 내용이다. 당시 기자는 한국군 파병 지역으로 예정되어 있는 이라크 키르쿠크에 왜 미군 부대가 들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키르쿠크 주둔 미군 173공정여단을 대체하는 부대는 한국군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하와이에서 날아온 미군 스코필드부대가 173공정여단과 2월 초부터 임무 교대 중이었다. 이 때 국방부는 하와이 부대는 두 달 동안 임시로 주둔할 뿐이며 한국군이 도착하는 대로 철수할 것이라고 답했다. 미군은 일정에 따라 ‘2월 부대원 교대 작전’을 수행할 뿐이라는 설명이었다(<시사저널> 제748호 참조)

이렇게 원칙을 중시한다는 미군이 돌연 한국 국민과 약속한 원칙을 무시했다. 3월8일 김장수 합참 작전본부장은 ‘2월 말 국방부 협조단이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미군 실무급에서 미군 병력 잔류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군은 대대급 병력이 키르쿠크 공항과 인근 도시 하위자 부근에 잔류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4사단이 한국군을 통제하려 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미군의 갑작스런 요청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한국군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라크 저항 세력은 동맹군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는 있지만 공격 횟수와 공격 강도에서 미군과 기타 외국군을 크게 구별하고 있다. 한국군은 ‘평화 재건’ 이미지를 강조하며 이라크 민심을 얻으려고 애써왔는데 미군과 같이 행동한다면 ‘점령군 미군을 보호하는 총알받이’ 이미지를 씻기 힘들다. 4사단의 통제를 받는다면 원하지 않는 작전에 나설 수도 있다.

두 번째 문제는 국민과의 신뢰다. 그동안 국방부는 여러 차례 국군이 키르쿠크 지역을 전담해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친다고 강조했다. 국회를 통과한 파병안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미군과의 공동 주둔은 결국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국방부는 “미군이 공동 주둔 요청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국방부가 미군의 의도를 전혀 몰랐는지 의문이다. <시사저널>은 2월 셋째주 발행된 제748호에서 키르쿠크에 미군이 공동 주둔하는지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미군은 키르쿠크 주둔 부대에 5천석 규모의 미군 전용 식당을 새로 짓고, 미국 군수업체와 계약을 체결하는 등 장기 주둔할 조짐을 보였다. 키르쿠크 현지인들은 미군이 전략 거점인 키르쿠크에서 결코 철수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 국방부는 “키르쿠크는 작은 도시여서 미군과 한국군이 같이 있을 수 없다”라며 완강히 부인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3월8일 현재 국방부는 “공식으로 아무런 요청을 받은 일이 없다”라고 강조하지만, 미군은 늘 비공식으로 타진한 뒤 공식 요청을 해왔다. 이 문제에 관해 국방부의 태도는 미심쩍다. 지난 3월3일 국방부협조단 자격으로 이라크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자이툰부대 황의돈 사단장(소장)은 한국군이 맡는 책임 지역에 대해 “미군측과 원만히 협의를 마쳤다”라고 말했다. 3월8일 김장수 합참 작전본부장은 키르쿠크 공항 경비를 위해 소규모 미군 병력은 받을 수 있다고 답했다. 윤광웅 국방보좌관도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전술적인 변화는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원칙은 무너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