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수사, 용두사미로 끝나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 ‘용두사미’ 조짐…기업 총수 사법 처리 최소화
기업에 대한 사법 처리가 시작되면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지난 4월10일부터 대검 중앙수사부는 한나라당에 차떼기로 1백50억원을 건넨 혐의로 LG그룹 강유식 부회장(전 구조본부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한때 출국이 금지되면서 수사 선상에 올랐던 구본무 회장은 ‘입건 유예’했다.

롯데그룹 역시 신격호 회장은 멀찌감치 검찰 칼날을 피했다. 4월12일 검찰은 롯데쇼핑 신동인 사장과 롯데건설 임승남 사장만 불구속 기소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빈 부회장 역시 ‘입건 유예’되었다.

입건 유예는 지금껏 검찰이 사용한 적이 없는 신조어다. 송광수 검찰총장마저 4월9일 출근길에 “입건 유예는 나도 처음 듣는 말이다. 입건하지 않겠다는 의미 아니냐”라고 말했다. 입건 유예는 수사 가치가 없어서 수사는 물론 사건부에도 기재하지 않는 조처다. 사실상 무혐의 처분과 같다.

한때 검찰 수사팀과 수뇌부 사이에 기업 총수 처리를 두고 갈등설이 불거진 적이 있다. 하지만 3월8일 안대희 중수부장이 직접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업인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을 약속한 터라 갈등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번 수사의 초점을 정치권의 불법 관행에 맞춘 만큼, 정치권의 요구에 마지 못해 응한 기업에 대해서는 처벌 수위를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이건희·정몽구 회장 사법처리 가능성 낮아

이런 방침에 따라 검찰의 사법 처리 대상은 LG그룹이나 롯데처럼 구조본부장이나 사장급으로 국한되었다. 회사 지시로 불법 자금 조성과 전달에 관여한 실무진은 제외되었고, 기업 총수도 불법 자금 조성과 전달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드러난 경우로 최소화했다.

이 기준에 따라 처벌될 오너급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도. 조회장은 한나라당 김영일 의원과 서정우 변호사에게 10억원씩 총 20억원 제공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고, 미국에 머무르면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김승연 회장 역시 서청원 의원에게 직접 10억원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불구속 기소 가능성이 크지만, 자수 자복한 기업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사법 처리를 약속한 만큼 더 지켜볼 일이다.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는 재계에 대한 검찰 수사의 화룡점정 격인데, 지금까지 수사와 검찰 기준에 따르면 정몽구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 역시 사법 처리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검찰은 정몽구 회장이 차떼기로 한나라당에 100억원을 건넨 뒤 보고를 받았다고 밝혀냈다. 하지만 사후 보고를 받은 것만으로는 사법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검찰 설명이다. 3백40억원대 뭉칫돈을 건넨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사후 보고조차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이같이 주장함에 따라 검찰 수사는 답보 상태다.

기업 총수에 대한 잇단 입건 유예를 두고 ‘봐주기’ 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4월9일 참여연대는 ‘심부름꾼만 처벌하고 돈 주인(총수)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과 원칙뿐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난다’며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4월10일 대한변호사협회도 ‘수백억원 불법 자금 전달에 좌절한 국민들이 또다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검찰 결정에 좌절한다’고 성명서를 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