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자금 앞에서 혼선 빚는 검찰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검찰, 국민 기대는 높고 ‘입증’은 어려워 곤혹
대검 중수부(부장 심재륜 검사장)의 한보 특혜대출 비리 및 김현철씨 비리 의혹 사건 재수사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수사의 방향이 국민적 의혹의 본줄기인 한보 사건의 ‘몸통’과, 김현철씨가 측근들을 통해 관리해온 거액 비자금에 맞춰지자 그 내용 하나하나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여권 핵심부는 지난 4월25일 김현철씨 청문회가 끝난 직후부터 검찰에 강력한 희망 사항을 전해왔다. 김현철씨를 하루빨리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를 통해 전달된 이런 의견은 중수부 수사팀에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재수사팀은 철저한 수사 없이 이미 확보된 ‘소액’ 수수 물증만으로 김씨를 구속하고 끝내면 또다시 검찰이 국민에게 당한다는 명분으로 맞서면서 은닉 자금 및 각종 비리에 대한 수사를 확대했다.

검찰 수사 방향 혼선 빚어

결국 중수부 재수사팀의 이런 접근 방식은 대선 자금이라는 시한 폭탄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직 수사팀이 공식 확인하지 않은 내용까지 언론에 ‘검찰 관계자’의 입을 빌려 흘러나옴으로써 수사 방향 자체가 큰 시련에 빠졌다. 심재륜 중수부장은 마침내 5월9일 “대선 자금을 수사 중이라든지, 뭉칫돈의 액수가 얼마라는 내용 등을 검찰 관계자의 입을 빌려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이처럼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해 곤혹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최근 이를 둘러싸고 불거지는 감당하기 힘든 파문 때문이다. 언론은 연일 검찰이 김현철씨가 측근들을 동원해 수백억원대 대선 자금 잉여금을 여러 기업체에 은닉한 혐의를 잡았다고 보도했다. 더 나아가 검찰이 92년 7월 서석재 의원을 통해 김영삼 후보에게 9백억원을 건넸다는 정태수 총회장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보도함으로써 정치권에 일파만파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보도가 김영삼 대통령의 하야에서부터 퇴임 후 사법 처리까지 언급하는 정치 공방으로 비화하자 김대통령은 오랜 침묵을 깨고 진노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불똥은 검찰로 튀었다. 김기수 총장은 이례적으로 ‘정태수씨가 92년 7월 서석재 의원을 통해 9백억원을 주었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공식 부인했다.

설상가상으로 국회 한보 청문회 직후인 4월28일 권영해 안기부장이 워커힐 호텔 빌라에서 김현철씨와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 차장을 3시간 동안 은밀히 만난 사실이 밝혀져 수사 외압을 둘러싸고 안기부장 퇴진 공방이 정치권으로 번졌다. 청와대는 이런 정보 유출이 검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의심을 품었다.

결국 중수부 재수사팀을 이끄는 심재륜 부장은 산적한 수사 지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외부 불똥을 끄러 다니기에 급급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런 사태 전개는 중수부 재수사팀의 수사 방향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큰 혼선을 빚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벌들을 또 법정에 세울 수 없다”

이번 사건 수사에서 남은 핵심은 중견 기업체들에서 쏟아져나오는 뭉칫돈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다.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 차장이 한솔그룹에 맡긴 50억원, 박태중 전 (주)심우 대표가 수시로 인출한 1백32억원,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이 김현철씨에게 받아 채권에 투자했다는 70억원이 그것이다.

관심은 이 돈이 대선 자금 잉여금일 경우 과연 검찰이 계속 수사를 해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검의 한 간부 검사는 “국민이 궁금해 하는 수사의 핵심은 한보가 제공한 대선 자금인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발견된 뭉칫돈이 설사 대선 자금 잉여금이라 할지라도 한보 자금인지 다른 기업들이 준 자금인지를 가려내기란 어려운 일 아닌가. 기업 총수들을 또다시 법정에 세우는 사태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검찰의 확고한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검찰의 이런 고민과 상관없이 대선 자금에 대한 국민의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진 상황에서 재수사팀이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화답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다. 국민의 기대와 성원 속에 두달 가까이 김현철씨 비리 수사에 매진해온 재수사팀이 어떤 성적표를 쥐게 될지 궁금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