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 노조 ‘작전상 후퇴’
  • 朴晟濬 기자 울산·박병출 주재기자 ()
  • 승인 1995.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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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신 노조 ‘파업=지방선거 여당 유리’ 인식…‘현대 사태’는 폭풍 전야
지난해 철도·지하철 연대 파업이라는 초유의 파국을 맞았던 노동판이 올해 임금 협상 시기를 앞두고 또다시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잠잠하던 노사 갈등 양상을 단번에 전국적 관심사로 끌어올린 곳은 울산 현대자동차 사업장이다. 5월12일 해고 근로자 양봉수씨(29)가 분신함으로써 촉발된 현대자동차 사태는, 발생 7일 만인 19일 새벽 정부의 공권력 투입이라는 신속한 처방에 의해 일단 진정 국면으로 돌아서는 듯했다. 하지만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과 민주노총준비위(민노준) 등 법외 노동 단체들이 대규모 연대 투쟁에 나서, 불씨는 울산 지역 전체로 번져가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87년 창립 이후 노선을 달리하는 노조 파벌간의 `‘계보 정치’ 형태로 운영되면서 집행부 장악을 위한 세력 다툼을 되풀이해 왔다. 이 과정에서 7~8개 계보가 통폐합돼 현재는 `‘매파’로 분류되는 범민주연합(범민련)과 〈현대노동자신문〉(현노신), `‘비둘기파’인 한빛회 중심의 현 이영복 집행부가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오는 8월 6대 노조위원장 선거를 의식한 강성 계열이 자파 소속 노조원의 분신을 계기로 집행부에 연합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파업을 주도한 `‘양봉수 동지 분신대책위’ 의장단은 모두 전임 노조위원장인데, 이상범씨(32·2대)는 현노신, 이헌구씨(34·3대)와 윤선근씨(32·4대)는 범민련의 중심 인물이다. 분신한 양씨 역시 지난 2월 해고될 때까지 범민련계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총파업을 시작한 16일부터 회사와 정부는 고립무원 상태의 노조를 ‘구출’하려 반격에 나섰다. 노동부가 분신대책위원 12명에게 `‘불법 행위를 중단하고 즉시 생산 현장에 복귀하라’는 경고 서한을 전달했고, 회사측은 이들을 업무 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

정부는 ‘6월 노동 대란’ 원한다?

자율 교섭과 노사 분규 불개입 원칙을 여러 차례 강조해온 정부가 오히려 유례 없이 신속한 진화에 나서는 모습은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사태가 더 확대되기 전에 외부 노동계와의 이음쇠를 자르고, 초대형 분규가 예상되는 한국통신 노조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겠다는 `‘선제 공격’ 의도로 해석된다. 또한 정부는 현대자동차의 매출 손실과 협력업체의 자금난이 경제에 타격을 줄 경우, 가뜩이나 멀어진 울산 지역 민심이 지방 선거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도 걱정해야 할 처지이다.

정부의 의도를 더 `‘불순한’ 방향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공권력 투입이 노동계를 자극해 6월에 집중될 노사 분규를 `‘대란’으로 몰고 갈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고의로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판단은, 분규가 과격해질수록 유권자의 보수 성향을 자극해 민자당에 반사 이익을 안겨 줄 것이라는 판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

쟁의 돌입 직전까지 갔다가 최근 회사측에 `‘냉각 기간’을 제의하면서 갑작스럽게 한발짝 물러선 한국통신 노조(위원장 유덕상)에 대해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처는 이같은 시각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5월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통해 한국통신 노조측이 내건 `‘불법 행위자에 대한 처벌 중단 요구’에 대해 “노조가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데 이어, 마침내 21일 한국통신 본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이 회사 노조 교육국장 오용철씨 (39·여수 무선전신국 소속) 등 노조 간부 5명을 붙잡아 업무 방해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정부가 직접 개입 태도를 명백히 하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노조가 본연의 영역 외의 문제를 빌미로 갖가지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말고도, `‘사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통신망이 마비되는 등 국가 안보에 엄청난 혼란이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같은 정부측 논리가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통신 노조측은, 자기네가 쟁의 발생 결의에 따른 일체의 집단 행동을 유보하고 냉각 기간을 갖자고 제안했음에도 오히려 정부측이 노조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발동하는 등 강경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데 대해 “일부러 파업을 유도해 지자제 선거 국면을 일거에 정부·여당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정부와 한국통신측이 상황을 고의적으로 악화시킨다는 근거로, 노조측은 당초 최대 교섭 과제로 꼽았던 임금 협상 문제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한국통신 입사 6년째를 맞은 한 근로자는 “몇년째 계속된 임금 동결 탓에 현재 한달 기본급이 38만원으로 묶여 있다. 또 우리보다 임금 수준이 높은 데이콤은 올해 임금 인상률을 8%로 결정했다. 바로 이 때문에 올해 노사 교섭에서는 임금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걸려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현대자동차와 한국통신에 대해 정부측이 신속하고 단호한 조처를 취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상황이 살얼음판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그룹 노조 연합체인 현총련은 이미 5월22일 울산해수욕장에서 `‘현대자동차 노조 탄압 규탄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공권력 투입 이후의 사태에 대한 본격적인 공동 대응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회생 가능성 20% 이하로 진단 받은 양씨가 사망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갈 수 있다. 게다가 노동운동의 보루로 자처하는 민노준도 소속 사업장의 쟁의 행위 돌입 시기를 앞당기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정부측의 대대적인 검거령에도 불구하고 유덕상 위원장 등 한국통신 노조 집행부는 서울 명동성당에 집결해 사태를 진두 지휘하고 있다. `‘폭풍 전야’의 긴장감은 갈수록 팽팽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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