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아물지 않는 상처
  • 許匡畯 기자 ()
  • 승인 199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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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태’ 진상 규명은 아직 ‘겨울잠’
무덤에 묻히는 것은 망자의 시신이지만, 봉분을 봉곳하게 채우는 것은 한과 아쉬움이다. 한날 한시에 비명 횡사한 1백32명의 죽음이 엉켜 있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百祖一孫之墓’. 멀리 산방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공동 묘지의 한은 이맘때면 새로 움트는 잔디처럼 또다시 피어난다. 48년 4·3사태로 비롯한 피바람이 2년 넘게 계속되던 50년 8월. 예비 검속으로 경찰에 구금되었던 이 마을 주민 1백32명은 대정읍 섯알오름 굴 속에서 비참하게 사살됐다.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7년 만에 대충 뼈를 추려 함께 묘를 쓰고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대정읍 상모리에 사는 이경익옹(71·사진)은 가족과 친척 27명을 이 묘지에 묻었다. 사건이 난 뒤 곧 굴을 찾아갔으나 경찰 눈이 무서워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했다. 7년 만에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이미 신원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가 찾은 것이라고는 미제 모기장으로 만든 속옷을 입고 있었던 친형뿐이었다.

4월3일 오전 제주시 탑동광장에서는 당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반공유족회가 이름을 바꾼 ‘제주도 4·3사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와 재야 사회단체의 합동 위령제였다. 두 단체의 합동 위령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93년 10월 제주도 의회와 재야 단체가 국회에 올린 진상 규명 청원서는 아직 국회 운영위원회 서류더미 속에서 잠자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역사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릴수록 상처가 덧날 뿐이다. 한라산 허리를 휘돌아 내려와 산방산을 스치다 이곳 스산한 무덤 위를 떠도는 바람의 뿌리는 엉뚱하게도 ‘서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깨지고 다시 서기를 반복한 이 묘지의 비석이 이를 증명한다. 제주도민들이 여전히 ‘4·3사태’의 진상 규명을 정권 민주성의 한 척도로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높이 3백50m 산방산 허리를 휘돌아 이곳 무덤 위를 떠도는 봄바람에 잠들지 못하는 상처는 다시 돋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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