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분단 고통 안고 떠도는 불귀의 넋
  • 베를린·김진웅 통신원/서울·이문재 기자 ()
  • 승인 1995.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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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작곡가 윤이상씨 별세, 39년 만에 영정만 귀국… 서울·베를린서 동시 추모제
스스로를 ‘20세기 한국의 오디세우스’라고 칭했던 윤이상씨는 한 장의 영정으로 조용히 고국 땅을 밟았다. 베를린 분향소를 출발한 고인의 영정은 11월6일 저녁 6시30분 김포공항을 통해 ‘귀향’했다. 고인의 ‘39년 만의 입국’을 지켜보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이튿날인 7일부터 추도식(11월11일 예정)에 이르기까지 서울 내수동 로얄빌딩 6층 한국작곡가협회에 차려진 분향소에는 그의 음악과 삶을 기리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고향 선산을 둘러봐야지요. 제가 3대 독자요 장손인데 지금까지 조상의 묘를 방치하고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8월 고국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 축제(9월8~17일)에 참석하기 위해 꿈에 그리던 귀국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는 파리(당시 그는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에서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음악·공연 예술 전문지 <객석>에는 ‘나는 귀국하면 내가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때 나는 흙 가까이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특별 기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의 갈등을 비롯해 ‘아직 밝힐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윤이상 음악 축제는 그 주인이 앉을 자리를 비워 놓은 채 막을 올려야 했다. 그로부터 1년2개월 뒤인 11월4일 오전 0시45분(현지 시각 3일 오후 4시), 지병인 천식이 일으킨 합병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윤이상씨는 베를린 자택 근처의 슈판다우 발트 병원에서 영면하고 말았다. 향년 78세. 부인 이수자 여사(70)와 미국에 사는 딸 윤 정씨(44) 등 가족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세계를 하나로, 하모니 이룬 인물”

분향소가 차려진 고인의 베를린 자택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서쪽 끝 클라도우. 반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공교롭게도 고국의 분단과 고향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과거 동·서독 분단 시절, 서베를린과 포츠담을 가로지르던 장벽에서 고국의 분단을,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에서는 고향 통영 앞바다를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택의 분향소에는 유가족, 독일 음악가협회와 함께 장례 집행을 맡은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뮌스터 대학) 부부와 한국에서 온 고인의 절친한 친구인 지휘자 임원식씨를 비롯한 재독 한인들, 그리고 고인의 오페라 <심청>의 대본을 쓴 하랄드 쿤츠, 윤이상 음악연구자인 발터 볼프강 슈파거, 동백림 사건 때 고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귄터 푸로이덴 베르크 교수 등 독일 음악계와 학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11월5일 현재 장례식 일정은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현대 음악의 큰 별인 윤이상씨의 타계를 대서특필했다.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불협화음이 만연한 시대에 세계를 하나로 잇는 하모니를 이룬 인물, 음악계의 큰 별이 사라졌다’고 애도하면서, 일제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굴곡된 한국 역사와 함께 고난의 연속이던 고인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전했다. <디 벨트>도 ‘음악을 통해 한국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해 살아온 휴머니스트’였다고 고인을 높이 평가했다.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는 ‘작곡가로서 동양과 서양 문화를 잇는 중재자’ 역을 탁월하게 수행했다며 고인의 삶과 예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윤이상 음악 축제를 앞두고 “내가 공항으로 마중나갈 테니 아무 걱정 말라”며 50년 지기를 기다렸던 지휘자 임원식씨에 따르면, 윤이상씨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를린 슈판다우 공원묘지 특별 묘역에 ‘누울 자리’를 미리 보아 두었으며, 가족에게는 장례를 ‘불교식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달라는 부탁을 미리 해 놓았다는 것이다. 윤이상씨를 잘 아는 한 음악 관계자는 “조국이 통일되지 않는 한 영주 귀국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땅의 지식인 반성해야”

서울에 마련된 고인의 분향소와 추모제는 베를린으로 조문을 떠난 임원식씨가, 서울에 있는 윤이상씨의 제자 김정길 교수(서울대 음대)와 지난해 윤이상 음악 축제를 기획한 예음문화재단 김용현 상무 등과 연락해 한국음악가협회·한국작곡가협회·예음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준비했다. 한편 한국에 살고 있는 고인의 여동생 윤동화씨(65)가 인천 주안5동 용화선원에 고인의 분향소를 마련해 명복을 빌었고, 용화선원의 환산 스님은 11월7일 장례식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다.

지난해 9월, 파리에서 윤이상씨의 귀국 비행기표를 손에 쥐고 있었던 예음문화재단 김용현 상무는 당시 “위대한 작곡가를 남의 나라에 버려 놓고 고향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이 땅의 모든 지식인이 반성해야 한다”고 안타까워한 바 있다. 김용현씨의 안타까움은 이번 장례식과 추모제를 통해 분단 현실의 상처로 깊이 각인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이상 음악과 생애의 ‘귀향’은 앞으로 그 상처의 치유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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