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강타한 ‘대구 복공판’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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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합 다지던 차에 대참사…“엎친 데 덮친 격, 6월 선거 막막”
‘노코멘트’. 대구 가스 폭발 참사가 정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여야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말하기를 꺼린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참사 앞에서 정치적 타격을 걱정하는 것이나 반사 이익을 도모하는 것, 양쪽 다 국민의 거센 비난을 부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석상에서의 이야기다. 여야 정치인 대부분이 사석에서는 대구 참사가 몰고올 정치적 파장과 지방 선거에 미칠 영향을 화제로 삼고 있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민자당과 민주당 총무단은 한결같이 ‘대구 참사의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촉구하면서도, 이 참사를 5월 임시국회의 의제로 올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한동안 입씨름을 벌였다. 이는 이 사건이 안고 있는 정치적 함축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민자당 지도부와 대구 지역 국회의원들은 사고 뒷수습을 하느라 4월 마지막 주말을 정신 없이 보냈다. 너나 할 것 없이 현지 방문, 헌혈, 민심 청취, 병원 방문 따위로 눈코 뜰새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역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사고가 터진 금요일(4월28일) 오후 기업 총수 출신 김석원씨의 달성 지구당 개편대회를 시작으로, 이 지역에서는 주말 내내 정치성 행사가 벌어질 참이었다. 토요일 오후 3시에는 경북 도지사 후보인 이의근 전 청와대 행정수석의 저서 출판 기념회가, 저녁에는 경북 지역 국회의원 간담회 일정까지 잡혀 있었다. 이 간담회는 김윤환 정무장관과 김덕룡 사무총장 사이에 벌어졌던 ‘전과자와 신주류’ 공방전을 수습하는 한편 선거를 앞두고 심기일전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터진 대구 가스 폭발 참사는 주말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36쪽 정치마당 참조).

지역 정치인들 심한 동요

현 정권 출범 이후 대구·경북의 ‘반YS, 반민자’ 정서는 언론과 정치권 인사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적돼 왔다. 반면 청와대와 민자당 주류는 대구·경북(TK) 정서란 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이 자극적으로 만들어낸 매스컴 용어라고 몰아붙였다. 최근에는 호남과 충청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야권의 ‘뚜렷한 지역 지도자’가 형성되지 않은 만큼, 큰 선거판에서는 친여권 성향이 유지될 것으로 낙관하는 기류마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참사로 그 가냘픈 희망의 끈조차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민자당의 한 중진 의원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무어라 할 말도 없고, 선거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조기 방문’도 이런 민심을 감안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당초 청와대에서는 사망자의 시신을 모두 발굴하고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김대통령이 현지를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갔던 이홍구 국무총리와 이춘구 민자당 대표 일행이 예정대로 일정을 못 마칠 정도로 지역민들로부터 봉변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구수 회의가 다시 열렸다. 참모진들은 ‘현지 분위기가 수습 안된 시점에 대통령의 방문은 무리다’ ‘그래도 일찍 내려가는 게 낫다’는 등 엇갈린 판단을 내놓았는데, 김대통령은 토요일 오후 조기 방문을 택했다.

뿐만 아니라 김대통령이 법적·제도적 장치가 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구 지역을 ‘특별 재해지역’으로 서둘러 선포한 것도 이번 사건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사건 당일 대부분의 텔레비전 방송이 생중계를 외면하고 고정 프로를 내보내는 등 사건을 ‘축소 보도’한 것은 선거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의 언론 통제 때문이라는 여론이 비등할 정도로, 정부 불신 심리가 팽배해 있다. 민자당은 대구시장 후보로 내정한 조해녕 전 대구시장을 그대로 추대한다는 방침이지만, 야권에서는 ‘조해녕 책임론’을 끈질기게 제기해 흠집을 낼 기세다. 민자당으로서는 이래저래 곤욕스런 선거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편 이 지역 출신 여권 정치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더욱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여기게 되었다. 김덕룡 사무총장과 김윤환 정무장관이 민자당 주체를 둘러싸고 벌인 신경전은 사건이 터지기 전에 봉합과 화해의 국면으로 접어들었었다. 선거를 목전에 둔 적전 분열은 안된다는 데 양쪽 다 공감했기 때문이다.

박철언씨, 비판 강도 높이며 헌혈 운동

그러나 감정의 골, 인식의 격차가 당장에 메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김장관의 발언은, 정권의 핵인 민주계가 민정계 다수를 ‘과거 군사 정권에 봉사했던 전과자’로 보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상기시켰다. 즉 TK 그룹은 김장관의 발언을 통해 정가에 나돌았던 15대 총선 ‘물갈이’가 결코 헛된 소문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대구 참사는 당내 역학 구도상 위기를 느끼는 TK에게 ‘존재의 위기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이 지역의 한 재선 의원은 “당내에서 전과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역에서 표를 얻겠는가. 그런데 이번엔 아예 현행범까지 된 꼴이다. 당내 물갈이가 문제가 아니다. 민자당 공천장이 낙선 통고장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동안 민자당을 떠날 시기와 명분만 찾던 일부 의원들의 경우 심한 동요를 보이고 있는 만큼 지방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당을 떠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반민자·비민주’로 표현되는 이 지역 정서를 흡수할 정치 공간을 모색해 오던 ‘나라와 고향을 위한 모임’(대표 박철언 전 의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 비판 수위를 한껏 높이고 있다. 박 전의원은 ‘장기적 비전이 없이 즉흥적인 깜짝쇼와 문민 독재에 의존해온 권력의 오만방자함이 사고 공화국을 만들었다’면서 현정권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한편, 지역에서 대대적인 헌혈 운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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