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승리’가 슬픈 섬마을
  • 덕적도·成耆英 기자 ()
  • 승인 1995.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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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주민들, 핵폐기장 건설 찬반 대립 후유증 ‘위험 수위’ 넘어
10월13일 오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사무소. 정부의 ‘굴업도 핵폐기장 선정 재검토’ 발표 이후 처음으로 주민 30여 명이 둘러앉았다. 주민 화합 방안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끝내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며 막 회의를 마치려던 참이었다. 회의장 한쪽 구석에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인 한 사람이 일어나 자리를 뜨려던 사람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형님 아우 하며 사이 좋게 살던 덕적도 주민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게 누군데 화합을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로 화합할 수 없다.”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핵폐기장 반대투쟁위원회의 수석 대표를 맡아 시위하다가 구속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송은호씨(63) 부인이었다.

경찰 2백80여 명 아직도 ‘주둔’

지금 덕적도 주민들에게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 열 달 동안 핵폐기장 반대를 외치며 노인부터 부녀자까지 싸운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승리감이나 안도감이 그 하나이다. 또 하나는 반대와 찬성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던 주민들 간의 반목과 불신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작년 12월 덕적도의 새끼 섬인 굴업도가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 과정에서 현지 주민 6명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5명은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되었으나 1명은 아직도 옥중에 있다. 이밖에도 ‘굴업도 핵폐기장 선정 재검토’ 방침이 결정되기까지 덕적도와 굴업도 주민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섬 주민 전체가 반대파와 찬성파로 갈리는 바람에 이웃끼리 반목하는 일이 늘어났다. 핵폐기장 문제가 발생하기 전인 지난 한 해 동안 덕적파출소가 처리한 사건 수는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행락객들이 일으킨 단 3건. 섬에 거주하는 7백명 남짓한 주민 대부분이 이웃이나 친척 관계로 얽혀 있어 사건이 날래야 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 지역에 핵폐기장을 건설한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 섬 전체가 반대 투쟁에 휩싸이면서 95년 들어 사건·사고가 30여 건이나 발생했다.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충돌과 폭력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그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삼촌·조카 하며 지내던 찬성측의 차두회씨가 반대측의 장정만씨를 폭행해 피해자가 장파열로 병원에 입원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차씨는 장씨가 퇴원한 뒤 치료비와 보상비 등을 요구하자 ‘협박’했다 하여 장씨를 고소해 놓고 있다. 지금도 이 섬에는 지난해 12월 전격적인 부지 선정 발표와 동시에 ‘상륙’한 경찰 병력 중 2백80여 명이 주둔해 있다. 현지 주민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이다.

반대 투쟁 과정에서 주민 간의 불신도 극에 달했다. 찬성파들을 향해 매향노(賣鄕奴)라는 손가락질이 잇따랐다. 주민 생활과 직접 관계된 갈등도 있었다. 섬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유류 공급이다. 그동안은 공급업자 1명이 인천에서 기름을 실어다 주민에게 공급해 왔다. 그러나 그가 찬성파로 돌아서면서 주민에 대한 유류 공급이 중단됐다. 반대파 주민들은 이 업자가 전에 없던 배달료를 요구하고 판매를 제한하는 등 주민들을 압박했다고 말하고, 공급업자는 반대파 주민들이 앞장서 불매 운동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행정구역상으로 덕적면 서포3리로 되어 있는 굴업도의 고덕현 이장. 그는 이번 사태의 최대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굴업도 주민 9명의 서명을 받아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덕적도 출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안전성에 전혀 문제가 없고 주민들에게도 ‘그냥 살 사람은 살아도 좋다’고까지 설득하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겠는가. 덕적도에 나갔다가 부녀자들에게 멱살잡이를 당하는 수모도 당했다. 이제 다 끝난 일이지만 솔직히 지금도 주민 대하기가 서먹서먹하다”고 말했다.

어느날 갑자기 ‘핵쓰레기’라는 날벼락을 맞아 찬반으로 편이 갈린 이곳 주민들이 내는 한 목소리는 ‘6·25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처럼 극심했던 덕적도의 싸움은 일단 끝났다. 그러나 정부의 무책임한 핵 정책이 깊게 할퀴고 지나간 섬마을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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