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이냐 봉합이냐, 돈봉투 후유증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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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이총재·동교동계 ‘돈봉투’로 정면 충돌
민주당 이기택 총재계와 동교동계가 끝내 정면으로 충돌했다. 지난 연말 이총재가 주도한 민주당의 12·12 투쟁 이후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온 양 계파는 민주당 경기도지부 경선에서 마침내 큰 파열음을 내고 말았다.

5월13일 오후 경선장인 안양문화예술회관에서는 폭언과 폭력이 난무했다. 양측 대의원들은 경선 벽두부터 상대 계보 국회의원들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대의원들에 대한 향응 시비로 투표가 지연된 데 이어 대회장에서 돈봉투가 발견돼 경선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민주당 경기도지부장이며 경선 선거관리본부장이었던 이기택 총재계의 이규택 의원은 동교동계 대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양복이 뜯겨 나가고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 “당을 함께할 사람이 못된다”는 막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투표함은 결국 경선장에서 개봉되지 못하고 중앙당사로 옮겨져 총재단 회의를 거친 뒤 15일 뚜껑을 열었는데, 결과는 장경우 의원이 2백26표 대 2백17표로 안동선 의원을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개표 결과에 상관없이 양측의 대립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동교동측은 문제를 일으킨 두 후보 모두 사퇴할 것을 주장하고 있고 이기택 총재계는 진상 규명과 함께 폭력 사태를 야기한 책임자까지 처벌하자고 맞서고 있다.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실제로 돈봉투가 뿌려졌는지, 또 향응이 베풀어졌는지는 양 진영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양측이 서로의 치부를 다투어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두 진영의 자제력 잃은 까발리기를 지켜보면서 “프로레슬링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한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이, 한 레슬러가 쇼라고 폭로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것을 빗대서 한 말이다.

DJ·JP 관계 싸고 감정 골 깊어져

양측이 서로 폭로한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이대표와 장경우 의원측은 투표 지연의 발단이 된 대의원 집단 숙식의 원인은 동교동측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동교동측이 막판에 대의원들에게 거액의 돈을 뿌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어쩔 수 없이 자파 대의원들을 `‘격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대표측은 안동선 의원측이 돌린 돈봉투를 증거물로 입수하고 있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안후보측은 장후보측이 인천 올림푸스 호텔에서 대의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이미 공개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기택 총재계가 이번 경선 과정에서 대의원들에게 수억원을 뿌렸다는 얘기를 흘리고 있다. 실제로 경선장에서 말썽이 일어나기 전 두 진영에서는 서로 대의원들에게 봉투를 돌렸음을 확인하고 자제하기로 약속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재 이총재는 기왕 까발리려면 이번에 치른 각 지역 경선과, 과거 야당에서 선거와 관련해 일어난 모든 불미스러운 일을 조사하자고 맞서고 있다. 이총재는 지난 대선 때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과의 돈 관계도 들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로 대립하더라도 건드리지 않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동교동측은 야당의 오랜 전통과 묵계를 깨고 있다”며 분노했다고 그의 측근들은 전한다.

현재 양측은 서로의 퇴로를 차단하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리고 있다. 민주당 한 인사의 표현을 빌리면 ‘이혼하기 직전의 부부처럼 서로 할말 못할 말 마구 퍼붓고 있는’ 형국이다. 두 진영의 싸움은 경찰과 검찰의 개입도 초래할 전망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규택 의원이 동교동계의 권노갑 의원 등을 고소하면 양 진영은 법원에서 얼굴을 마주댈 수도 있다. 양측은 과거의 프로레슬링계처럼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공멸하기 직전의 상태에 와 있다.

이총재와 동교동계의 불화는 지난 연말 12·12 투쟁 때 한번 파국 고비를 넘긴 후 악화일로를 걸었다. 특히 민자당에서 김종필 대표가 축출돼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이총재 진영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총재 측근들은 김종필 대표가 축출되는 것을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문희상 총재 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나면 “악재야, 악재야” 하고 되뇌곤 했다. 이총재측은 나름대로 확실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독립해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과 손을 잡게 되면 지역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이총재의 효용성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즈음 이총재 주변에서는 내각제 기치를 내건 김총재와, 정계 복귀를 위해서 내각제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되는 김이사장이 연합하게 되면 차기 대권에 도전하려는 이총재의 꿈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자민련 김총재와 김이사장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양상을 보이자 이총재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5월9일 민주당 변평섭 대전시장 후보 추대대회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합 움직임에 재를 뿌리는 발언을 했다. 그는 “자민련은 김종필씨가 김영삼 대통령의 부하로 있다가 정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당일 뿐이다. 그런 당을 두고 애국충정, 충절 어쩌고 하는 것은 듣기에도 민망한 일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김종필씨는 과거 살인과 고문을 한 중앙정보부를 만든 장본인이 아니냐” 하는 발언도 했다. 이총재측은 김종필 총재와 김대중 이사장의 접근을 외부에서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번 경선 사태 직후에도 이총재 측근들은 “권노갑 부총재가 이총재와 결별하더라도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일을 크게 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총재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경주의 신화’를 재현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경주 보선에서 당내외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총재는 마치 자기 선거를 치르듯이 뛰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당시 이총재는 이상두 후보에게 물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총재는 경기도지사 선거를 경주 보선 치르듯 하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그는 경기도지사 후보에 그가 미는 장경우 의원이 당선하면 경기도에서 살다시피 하며 선거운동을 지휘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대표가 경기도에 집착하는 데는 취약한 지역 기반을 보완하고 다시 한번 어려운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당내에서 위상을 높이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이총재의 이런 움직임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이총재가 개인적인 공명심과 자기 계보를 확대하기 위해 이번 지방선거를 마치 사적인 행사처럼 치르려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총재는 이번 지방 선거 공천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기 계보만 챙긴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이총재가 당의 대표로서 전체적인 선거를 관리한다기보다는 8월 전당대회를 의식해 어떻게 하면 자파 대의원을 1명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다는 비판이 경기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많이 나왔었다.

하지만 이총재측은 동교동측의 이런 움직임을 8월 전당대회 때 자기를 거세하려는 전조로 받아들인 것 같다. 이총재 측근들은 “저쪽(동교동)이 서울시장 후보로 조 순씨를 영입하고 경기지사 후보로 이종찬씨를 내세우려 하면서 이총재와 상의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짐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조 순씨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이총재가 소외됐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도 양측의 대립을 심화시킨 한 요인이 된 것 같다.
수습되더라도 원상 회복 힘들 듯

현재 민주당내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당사와 서울 아현동 이기택 총재 집과 각 의원들의 집에는 욕설을 퍼붓는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고 있다. 민주당의 지방 선거 후보자들은 “지금 운동하고 다니면 역효과가 나니까 며칠 잠적해야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방 선거는 해보나마나다” “대구 폭발사건이 열번 일어난 만큼 피해를 입었다” 하고 탄식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경선 현장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정치권에 몸담은 것을 후회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양 계파가 더 이상 일을 확대하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머지않아 사태는 어떻게든 수습 단계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일을 주도해온 동교동계의 권노갑 부총재 라인이 아닌 제2의 라인에서 조심스럽게 이총재에게 김이사장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민주당 내에서는 동교동계의 역학 구조에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수습된다고 해도 이총재와 동교동의 관계가 쉽게 복원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측은 서로에게 이미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양측은 이제 결별의 명분을 쌓는 일만 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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