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가슴의 산불은 누가 끄나
  • 강원 고성·崔寧宰 기자 ()
  • 승인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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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어용찬씨(45)는 고성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성군 죽왕면 삼포 1리는 어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안위도 걱정되었지만, 선산에 모신 조상의 묘소가 무사할지 여간 조바심 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랴부랴 고향으로 달려가 보니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렸고, 봉분 일대의 웃자란 떼는 시커멓게 타버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4월26일 어씨는 죄스럽고 참담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조상님 앞에 절을 올렸다.
총 3천ha에 이르는 산림을 숯덩이로 만든 고성 산불은 3일 만에 겨우 불길이 잡혔으나 57세대 1백72명의 이재민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픈 사연과 상처를 남겼다. 재산 피해만이 문제가 아니다. 손때에 절어 윤기가 흐르도록 정든 문설주, 생활의 고단함을 견디느라 찌그러지고 못생긴 양은 냄비, 파편으로 남은 기와 한 조각일지언정 보상비 몇푼으로 되살릴 길은 없을 것이다.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분통 터지는 국민은 묻는다.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국민에게 죄송하다, 책임자를 가려내어 엄중히 문책하겠다, 조속히 피해를 복구하겠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책을 세우겠다….

이 몇년 사이 ‘단군 이래 최대’ 규모로 불쑥불쑥 터져온 대형 재난은 그것이 천재지변이 아니라 턱없이 마음을 놓아버린 사람의 게으름과 어설픔에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삼풍 사고 때 삽·곡괭이·장갑·손전등같이 굳이 장비랄 것도 없는 물품을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구걸하던 낯뜨거운 장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연출되었다. 산불을 예방할 시스템도, 불길을 잡을 전문 인력과 첨단 장비도 하나같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뒤늦게 띄운 헬기 몇 대로 그 어마어마한 산불이 잡혀줄 리 없을 텐데, 그처럼 대책 없는 무모함은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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