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 주주 권리 '낮잠' 자고 있다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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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제안권·이사 해임권 등 다양… 절차 까다롭고 실익 없어 제도 개선 시급
제일은행 소액 주주들이 신광식 전 행장 등 경영진을 상대로 4백억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낸 ‘사건’이 특히 돋보였던 것은, 소송 당사자들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이득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주 대표 소송은 순수한 공익 소송일 뿐이다.

일반 주주들이 여신 관리에 실패한 은행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내 경제적 손실을 보상받을 수 있다면, 6·29 은행 퇴출로 손실을 입은 동남·경기 등 5개 은행 경영진들은 무더기 소송 사태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주주들이 땅을 치며 비통해 하면서도 소송을 내지 않았던 것은, 절차만 복잡할 뿐 실익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익이 없는데도 번거로운 소송을 낼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소송 요건과 절차도 무척 까다롭다. 참여연대가 8월중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에 대해 대표 소송을 걸고 삼성전자 회계 장부 열람 청구권을 행사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소송 요건에 해당하는 삼성전자 주식 총수의 0.01%가 넘는 주식은 확보했지만, 주주들이 직접 ‘실질 주주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등 번거로운 과정이 남아 있다. 현재 삼성전자에 대한 소송 요건인 0.01%를 겨우 확보한 참여연대는 주주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발송하는 등 ‘실질 주주’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회계 장부 열람권을 행사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회계 장부 열람은 총주식 수의 0.5% 이상(자본금 천억원 이상인 회사의 경우 1% 이상)을 확보해야만 청구할 수 있고, 그것도 6개월 이상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에 한한다. 그래서 참여연대측은 열람권 청구 당시에만 지분 요건을 갖추면 주식 보유 기한에 관계 없이 그 권한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미 군단’의 권리는 한국 경제에 ‘약’

주주들이 경영 전반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는 대표 소송이나 회계 장부 열람 청구권뿐만이 아니다. 대표 소송 또한 이사뿐만 아니라 경영 감시를 제대로 못하는 감사, 심지어는 주식회사 발기인을 상대로도 낼 수 있다. 주주총회 의제를 주주들이 직접 낼 수 있는 주주 제안권도 있고, 이사·감사 해임 청구권, 회사 업무·재산 상태 검사 청구권 등 법 조항에 명시된 주주들의 권한은 실로 다양하다. 물론 이 다양한 주주 권한의 공통점은 그동안 하나같이 법조문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것.

물론 소액 주주들이 경영 감시를 명분으로 소송을 남발해 이권을 챙기려는 ‘부작용’이 염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에서 요구하는 대로 단 1주만 갖고 있어도 소송을 낼 수 있는 단독 주주권을 정부가 채택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처럼 소송 요건을 총 주식 수의 5∼10%로 높여 놓은 나라도 있다. 소액 주주들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경영자들이 온갖 소송에 휩싸이는 바람에 회사 경영 자체가 마비되고‘변호사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경영자들의 책임 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미국의 경우, 대표 소송이나 회계 장부 열람 등에서 단독 주주권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일본만 해도 독일보다도 낮은 3%의 지분만 있으면 주주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그만큼 경영자들의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경영자들이 눈치를 살펴야 할 대상이 물론 주주들뿐만은 아니다. 이제는 계열사들도 대주주나 오너의 위법 행위가 드러나면 법으로 해결하자고 팔을 걷어붙이는 마당이다. 모기업 구조 조정의 여파로 영업 정지 처분을 받은 새한종금이 대주주인 거평그룹 나승렬 회장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낸 것이 바로 이런 경우다. 밀어 주고 끌어 주던 관계에 있던 계열사가 모기업이 망하자마자 ‘법’을 앞세워 덤벼들 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경영자는 없겠지만, 한국 경제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최근 경영자를 상대로 급증하는 소송을 ‘독’이 아니라 ‘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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